저자 서문
1. 장수태왕
위대한 대고구려의 군주VS중국 천하에 수십 번 조공한 군주
강성해지는 중국 앞에서 실력을 취하여 국력을 유지하다
장수태왕 시대의 조공
장수태왕 시대의 고구려와 중국의 관계
장수태왕이 중국에 바친 조공의 의미
역사학계에서는 '조공은 일종의 무역이었다'고 인식되고 있다. 조공은 일방적으로 바치는 게 아니었다. 조공은 예물 증정의 형식을 띠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대가성을 수반했다. 그래서 조공을 받는 대국에서는 그에 대한 답례로 회사를 했다. 회사란 답례로 하사한다는 의미다. 이러한 상호 간의 예물 교환은 실질적으로 물물교환 형식의 무역이었다. 외국이 조공을 하러 오면, 중국 황제는 한편으로는 반가우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었다. 받은 것 이상으로 답례를 해야 해씨 때문이다. 그래서 중국은 이웃나라들의 조공 횟수를 적정 수준으로 유지하려고 애썼다. 예컨대 명나라는 3년에 한번만 조공하라고 하고 조선은 1년에 세 번 조공하겠다는 다툼이 생긴 사실은, 조공이 중국에 큰 부담이 되었음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무역전쟁'으로 고구려 경제를 지킨 장수태왕
2. 강감찬
고려를 살린 구국의 명장VS동아시아 세력균형을 다진 명장
요나라의 대약진을 막아 동아시아에 균형을 가져오다
고려-요나라-송나라의 동아시아 3자 구도
현상타파를 위한 요나라의 침략전쟁
귀주대첩의 역사적 의의
한류의 소재가 될 수도 있는 강감찬
3. 공민왕
인정 많은 개혁군주VS냉혹한 정치기술자
대리인 신돈을 내세워 왕권강화를 추구한 정략가
몽골제국(원나라) 간섭기의 고려왕들은 몽골황실의 부마라는 지위를 바탕으로 자신의 왕권을 강화했다. 훗날 세조구제라고 부른 이것은 고려와 몽골의 강화가 성립된 이후에 세조 쿠빌라이에 의해 확립된 것으로, 고려가 몽골제국에 사대하는 조건으로 몽골제국이 고려의 왕실과 제도를 보장하는 시스템이다. 고려를 점령하거나 직접 통치할 역량이 없었던 몽골제국은 고려왕을 통한 간접적 고려 통제방식을 취한 것이다. 세조구제 하에서 고려왕들은 몽골제국의 지지를 배경을 친원파와 권문세족들을 상대로 왕권을 강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몽골제국의 세계 패권이 약화되고 중원에서 반란이 발생하자 고려에서도 반원적인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런 새로운 정세는 고려왕들에게 상호 모순적인 두 가지 의미를 던졌다. 하나는 시대적 분위기에 따라 반원운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반원운동을 할 경우에는 세조구제에 기초한 왕권이 약해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오스만제국의 정치
오스만제국의 정치는 어전회의(디완)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어전회의는 일종의 국무회의였다. 그런데 이 어전회의는 '꼭 참석해야 할 사람'이 불참한 상태에서 진행되었다. 누가 불참했을까? 바로 술탄이다. 술탄이 빠진 어전회의는 대재상(사드라잠)이 진행했다. 이러한 대재상 주재 하의 어전회의가 사실상 관행처럼 굳어졌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대재상들의 신분이었다. 그들의 대부분은 술탄에게 예속된 궁정노예 출신들이었다. 한편 대재상 아래의 재상(와즈르)에게는 궁정 노예 외에 환관이 배치되는 경우가 있었다. 술탄의 궁정노예들이 대재상이 되어 국정을 지휘했다는 것은, 그만큼 술탄이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술탄이 노예 출신을 대재상으로 내세운 이유
술탄이 직접 정치에 나서지 않고 대리인을 내세운 이유는 무엇일까? 술탄이 노예 출신 대재상들을 내세운 동기는 두 가지를 언급할 수 있다. 1. 자신의 권력을 배가시키기 위해서다. 술탄이 대재상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한 후에도 언제든지 그것을 되찾을 가능성이 있고 또 대재상이 술타늬 '주문'을 완벽하게 소화해낼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도리어 권력을 강화하는 방편이 될 수 있다. 통치자가 내세우는 대리인은 귀족이나 고급 관료들의 눈치를 살피지 않아도 된다. 그는 오로지 통치자만 믿고 권력을 행사하면 된다. 게다가 노예 출신 대재상들은 사회적 기반이 취약했다. 그래서 그들과 귀족·관료 사이에는 끈이 존재할 수 없었다. 2. 자신의 권력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대리인에게 국정을 위임한 경우에는, 설령 실패하더라도 그에게 책임을 떠넘길 수 있다.
술탄-궁정노예 관계와 유사한 공민왕-신돈 관계
공민왕이 반원적 개혁정책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무명의 승려 신도을 내세워 정치적으로 이용하다가 내버렸음을 추론케 한 다섯 가지 사실관계를 살펴보자. 1. 신돈은 오스만제국의 노예 출신 대재상들처럼 사회적 기반이 매우 취약한 인물이었다. 2. 공민왕은 신돈 집권기에도 여전히 의욕적인 생활을 했다. 3. 신돈의 집권기는 신진사대부의 정치적 상승, 다시 말해 반원적인 왕권강화의 과정이어싸. 신진사대부들을 끌여들여 왕권을 강화하는 방식은 이미 제26대 충선왕 때부터 시도되었다. 마찬가지로 공민왕이 공민왕 5년(1356)부터 반원정책을 실시한 것은 몽골이라는 약해지는 왕권기반을 포기하고 새로운 왕권기반을 구축하기 위한 정치적 포석이었다. 신돈 집권기에 혜택을 입은 집단은 신돈 같은 승려들이 아니라 유가적 소양을 갖춘 신진사대부들이었다. 신진사대부들은 신돈이 아닌 공민왕의 권력기반 강화에 꼭 필요한 사람들이었다. 4. 신돈의 인사숙청은 결코 신돈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신돈이 비판받은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 인사숙청이다. 신돈이 단행한 인사숙청이 과연 신돈 혼자 할 수 있는 일이었는지 따져보아야 한다. 신돈은 정권을 잡은 지 1개월 만에 영도첨의 이하 대신들을 파면·축출하고 대간들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이런 일이 신돈 집권 1개월 만에 일어났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1개월 안에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은, 사전에 충분한 기획과 준비를 거친 누군가가 배후에서 조종했음을 의미한다. 또 그만한 규모의 인사숙청은 최고권력자가 승인하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일이다. 5. 신돈이 발탁된 시점과 제거된 시점에서 최고권력을 행사한 사람은 다름 아닌 공민왕이었다. 신돈의 발탁 과정은 그야말로 전격적이고 파격적이었다. 신돈을 제거하는 과정도 그처럼 전격적이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고 있던 신돈이 한순간에 공민왕에 의해 제거된 것을 보면, 신돈 집권기 동안에도 공민왕이 신돈을 늘 주시하면서 언제라도 축출할 준비를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배후의 공민왕이 신돈보다 더 강력한 권력을 숨기고 신돈을 주시하고 있었다면, 신돈 집권기의 정치는 신돈이 아니라 공민왕의 의지로 이루어졌다고 보아야 한다.
개혁가이기 이전에 정치가였던 공민왕
4. 이성계
조선의 창업군주VS여진족 장군일 가능성이 있는 인물
여진족이 왕실을 차지했을 가능성이 있는 다민족 국가, 조선
엘리트 여진족 청년일 가능성이 있는 이성계
이성계가 고려 수도 개경에 처음 모습을 나타낸 때는 공민왕 5년(1356)이다. 당시 이성계는 22세의 젊은 무관이었다. 그가 함경도에서 개경까지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고려군이 쌍성총관부를 공격할 당시에 원나라 천호인 아버지 이자춘이 고려군에 내응했기 때문이다. 원나라 관할 하에 있던 쌍성총관부는 주로 여진족의 거주지였다. 이성계가 여진족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은, 이성계의 군단이 주로 여진족으로 구성되었다는 점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이성계 부대의 핵심인 이두란과 이원경 등은 보래 여진족 족장 출신이었다.
『태조실록』과『용비어천가』에 대한 사료비판을 막는 이유
이성계 조상들의 행적에 대한 의문
고려 조정에서 이성계를 중용한 이유
비주류 출신이라는 콤플렉스
한국은 다민족국가
5. 정도전
서민 편에 선 개혁가VS사대부 편에 선 신권주의자
정도전의 개혁, 누구를 위한 것인가?
정도전에 대한 한국인들의 인식
정도전이 추구한 정치체제
정도전이 추구한 정치체제의 핵심은 재상정치였다. 주자 사상의 영향을 받은 정도전은 '유교적 이상국가의 최고 통치자는 당연히 군주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군주는 본질적으로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정도전의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군주는 혈연에 따라 세습되기 때문이다. 천명을 대리하는 막중한 임무를 띤 군주가 이처럼 본질적으로 볼완전할 수밖에 없다면 그런 군주를 뒷받침할 만한 보완책이 필요할 수 밖에 없다. 그중 두가지로 세자교육과 재상정치를 들 수 있다. 정도전은 어리석고 유약한 군주가 출혀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어진 선비가 어릴 때부터 세자를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군주는 본래 불완전한 존재이므로 군주 스스로 정치를 하기보다는 어진 재상을 뽑아 그에게 정치를 맡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재상정치론의 속뜻
주자의 문집인 「주자대전」에 따르면, 주자는 재상이 정치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주자가 생각하는 재상은 사대부의 공론을 정치에 반영하는 주체였다. 그러므로 주자는 재상정치론은 결국 사대부의 정치참여를 위한 것이고 재상은 사대부의 대변자에 불과했다. 이러한 재상정치론은 황제를 견제하고 토지소유자 계급의 이익을 옹호하는 전통적 유가 이론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었다.
왕권주의VS신권주의 구도의 실상
6. 양녕대군
동생에게 양보한 형VS동생과 경쟁한 형
조선 초기의 왕권강화 과정에서 부적격 판정을 받은 왕자
세자 교체 이전 양녕대군의 태도
'양보'의 의미가 담긴 양녕대군이라는 호칭의 함의
7. 신숙주
배신의'숙주나물'VS유능한 외교관
세조를 도와 조선의 태평성대를 이끈 탁월한 인재
신숙주를 평가하는 기준
신숙주가 조선사회에 바친 선물 '태평성대'
신숙주에 대한 균형 잡힌 '관전법'
8. 연산군
'묻지마' 살인을 일삼은 폭군VS양반 사림세력을 견제한 왕권주의자
조선의 양반 사림들, 연산을 폭군으로 기록하다
조선시대 통치자가 가장 무서워한 대상
왕실 사람들이나 양반관료들이 툭 하면 내뱉는 '백성'은 엄밀히 말하면 '무지렁이' 서민들을 가리키는 표현이 아니라 양반계층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양반 기득권세력과 충돌한 연산군
연산군이 강경 일변도로 나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
9. 윤원형
국정을 어지럽힌 외척 난신VS서얼 등용을 추진한 약자의 편
양반 기득권세력의 이익독점에 제동을 건 정치가
성리학 이념이 만들어낸 서얼차별
서얼해방을 위한 사회적 노력
사림세력이 반발하는데도 불구하고 서얼해방을 위한 노력은 조선시대 내내 끊임없이 전개되었다. 그러한 노력의 성과로 다음과 같은 조치가 취해졌다. 1. 연산군 2년(1496)에는 2품 이상 관료의 첩자(첩의 아들)나 첩손(첩의 손자)이 잡과에 응시할 수 있도록 하는 조치가 취해졌고 2. 명종 8년(1553)에는 양첩자로서 양처와 혼인한 사람이 있는 경우에는 그 사람의 손자 때부터 문무과에 응시할 수 있도록 하고, 천첩자로서 양처와 혼인한 사람이 있는 경우에는 그 사람의 증손자 때부터 문무과에 응시할 수 있도록 했다. 다만 현진 곧 높은 자리에는 기용되지 못하도록 했다. 이로써 태종 15년(1415) 이래 문무과 응시가 막혔던 서얼들에게 비록 제한적이나마 응시의 길이 트이게 되었고 3. 임진왜란(1592~1599) 중에는 서얼이 납속·군공을 통해 허통이 될 수 있도록 하는 조치가 취해졌고 4. 인조 3년(1625)에는 양첩자(양민 첩의 아들)는 손자 때부터, 천첩자는 증손 때부터 허통될 수 있도록 하는 허통사목이 제정되었고 5. 숙종 22년(1696)에는 품계를 제한하는 조건으로 서얼도 과거에 응시할 수 있도록 했으며, 6. 정조 1년(1777)에는 서얼의 승진 범위를 확대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서얼허통에 대한 윤원형의 기여
윤원형에게 사심이 있었을까?
10. 이황
학문에만 전념한 군자VS관계를 들락거린 소인
16세기 말 중앙 정계를 접수한 사림의 지도자
학자로서의 이황과 관료로서의 이황
죽기 직전까지 관계를 결코 떠나지 않은 이황
정치권에 끊임없이 신호를 보낸 이황
이황이 갖고 있던 정치적 메리트
이황이야말로 진정한 '정치 9단'
이황을 재조명해야 하는 이유
11. 광해군
개혁을 추구한 군주VS실패한 역사의 죄인
개혁 실패의 책임은 광해군에게 있다
개혁에 실패하고 권좌까지 잃은 광해군
광해군이 소홀히 한 첫 번째 주의의무
광해군이 소홀히 한 두 번째 주의의무
정치적 자충수들로 개혁에 실패한 광해군
12. 김상헌
오랑캐에 불복한 비타협적 척화파VS살려고 신념을 꺾은 '실용주의자'
이념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한 병자호란 이후 조선 선비들의 표상
김상헌은 국세정세에 어두웠을까?
김상헌, 실제로는 국제정세에 매우 밝았다
'무대 위'의 김상헌과 '무대 뒤'의 김상헌
김상헌, 청나라에 가서도 소신을 지켰을까?
13. 송시열
효종과 함께한 북벌론의 주역VS'마음'뿐인 북벌론자
서인의 집권 명분을 위해 만들어진 북벌론 신화
북벌과는 무관한 효종의 군비증강
정통성 문제에 시달린 효종
정통성 강화를 추진한 효종과 이를 견제한 서인세력
북벌에 대한 송시열의 실제 입장
효종시대 북벌론의 실체
효종 10년(1659)의 독대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크게 3가지다. 1. 효종의 북벌론이 사실은 군비증강을 위한 빌미에 불과했으며 그것도 그나마 죽기 2개월 전에 '비밀'을 전제로 처음 발설되었다는 점이다. 그가 죽기 전에 송시열에게 북벌론을 개진한 것은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2. 송시열이 북벌 추진을 명확히 반대했다는 점이다. 3. 내관들이 없는 자리에서 독대를 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에는 북벌을 입에 담는 것조차 힘들었다는 점이다. 이런 점을 볼 때 효종이 의욕적으로 북벌을 추진했다는 인식이나 송시열이 북벌을 주장했다는 인식 등이 당시의 현실과 얼마나 동떨어진 것인지 느낄 수 있다.
예송논쟁의 전개와 북벌론 신화의 출현
생명력 질긴 송시열의 북벌론 신화
14. 정조
조선 중흥의 르네상스 군주VS한.중.일 르네상스 경쟁의 낙오자
조선 시대에 한.중.일 경쟁에서 낙오하다
17~18세기 동아시아 3국의 변화
일본이 조선을 추월한 시점
'우물 안 개구리', 정조의 르네상스
15. 김대건
최초의 조선인 순교자VS프랑스 군함을 탄 서양세력의 도우미
조선정부는 사탄 마귀가 아니었다!
조선 침략을 부추긴 프랑스 선교사들
프랑스인들에게 이용당한 김대건
김대건의 죽음은 종교적 죽음인가 정치적 죽음인가
16. 흥선대원군
꽉 막힌 강경 쇄국론자VS마지막까지 국제친선에 매달린 인물
내부정비가 덜 끝난 때에 서양을 만난 조선의 집권자
모험보다는 안정을 선택한 흥선대원군
이양선에 대한 흥선대원군의 태도
신미양요 직전 흥선대원군의 태도
알고 보면 부드러운 흥선대원군
연개소문 등은 칭찬하고 흥선대원군은 비판하는 이유
17. 명성황후
고종을 조종한 여인VS어디까지나 남편의 후원자
개항 이후 조선의 정치를 움직인 몸통은 고종황제
명성황후와 민씨 일문을 앞세워 정국을 주도한 고종
실제로 주변 사람들을 이용한 사람은 고종
노련한 외교 전문가, 고종
이처럼 유능한 고종을 명성황후가 조종할 수 있었을까?
18. 김옥균
친일파VS반청파
고종과 '이심전심'으로 반청을 실현하려 한 개혁가
한국인들의 복합적인 대일 감정
한의 정서와 친일파 개념
갑신정변의 본질은 친일이 아니었다
김옥균이 끌어들인 나라는 러시아
김옥균에게 친일은 수단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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