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무협], 문현선, 살림, 2004, (110412).

바람과 술 2011. 4. 12. 17:30

무협이 뭐길래?


중국어를 사용하는 대중이 있는 그 어디에서도 '무협'은 대중문화의 꽃이다.


중국문화가 이처럼 짝짓기에 골몰하는 까닭은 상형자를 가진 중국어의 언어적 성질 때문이라고도 한다. 글자 하나하나가 의미를 가지고 있는 한문은 확실히 말하거나 듣는 언어라기보다는 보거나 쓰는 언어이고, 그것을 말할 때 일어나는 모호함은 '2음절어로 말하기'를 통해 극복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중국어 고유의 음악성은 2음절어를 기본 동기로 삼는 시적 운율로 발전했다. 그 언어미학은 아예 변려문 같이 지극히 형식적인 문체를 창조함으로써 정점에 이른다. 이처럼 '짝짓기'에 열중하는 문화적 성향은 궁극적으로 하나의 문화 도식으로 통합된다.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을 망라하여 말할 수 있는 것, 그것은 바로 음양의 원리이다. 

 

협(俠), 당신은 누구십니까?


춘추전국, 전쟁이 곧 일상인 시절이었다. 거듭되는 전쟁의 와중에서 수많은 약소국들이 소멸되고 강대한 제후국에 합병되었다. 힘없는 나라의 국사들은 이제 갈 곳을 잃고 떠도는 신세가 되었다. 누구보다도 뛰어난 학식과 무예를 한 몸에 지닌 채, 자기 자신에 대한 최고의 자부심을 가지고, 그들은 천하를 떠돌았다. 나라를 잃고 떠돌았기에 이런 사람들은 유사라 불렀고, 돌아갈 곳도 붙잡는 사람도 없기에, 매인 몸이 아닌 그들은 곧잘 남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는 일을 자청했다. 남의 어려움을 전문적으로 해결해 주는 사람, 드디어 협이 중국 역사에 출현한 것이다. 춘추와 전국의 교체기에 등장한 협의 존재가 이전의 국사나 유사들과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유별난 자존감'이었다. 춘추와 전국의 틈바구니에서, 능력에 대한 대가를 지불할 후원자를 잃은 동시에, 그것을 지배하거나 이용할 권위와 권력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진 그들은 점차 독립적인 자존을 깨닫기 시작했고, '유별난 자존감'을 지닌 특수한 사회계층으로 자리매김했다. 어떤 대가를 위해서나 누군가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의 인격체로서 그 능력과 존재를 알아주는 사람에게 스스로 보답한다는 전형적인 협의 행동규범이 확립된 것이다. 그들은 물질적 기반을 포기하는 대신 정신적인 자유와 자아의 진정성을 추구하기 시작했고, 그들의 가치 기준은 일반 사회의 규범에 부합하기보다 스스로의 존재 증명에 더욱 합당한 것이었다. 


그들이 한 행동의 결과로 사람들은 그들이 '협'이라는 것을 알아본다. 이는 협의 존재와 행동규범이 이미 보편화되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들의 행위가 개인적이거나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지속성이 있는, 바꾸어 말하면 세습적인 형태로 굳어졌다는 사실도 주목할 만하다. 나아가 그 행위는 세습적일 뿐 아니라 집단적인 것이었고 사회적으로 공인을 받은 것이기도 했다. 이는 협이 당시에 분명한 사회적 역할을 담당하는 지위에 있었음을 암시한다. 협은 지역 사회에서 일정한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집단으로 성장했던 것이다. 전국 말기의 혼란은 법가의 학설로 무장한 진에 의해 수습되었다. 진의 통치는 자연히 숱한 반발에 부딪혔고, '신상필벌'의 법률은 그에 반대하는 무수한 사람들을 죄인으로 몰아 죽이거나 병신으로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협은 전문적으로 사람들을 감추어 주거나 도피시키고 그 생명을 구해 주는 것을 업으로 삼아 사회적 영향력을 갖는 존재로 성장한 것이다. [사기]의 기록은 춘추에서 한 초기에 이르는 중국의 역사에서 협이 어떻게 유별난 자존을 지닌 특별한 개인으로서 그 존재를 확립하였는가, 그리고 그들의 행위가 어떻게 규범화되었으며 사회적 존재로서의 그들을 어떻게 재규명했는가를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그리고 그 역사를 통해서 협은 고유의 행위준칙을 가진 개인으로, 그 행위를 통해 어떤 역할을 담당하는 사회적 존재로 자리매김한다. 바로 유협과 호협이다. 


진산의 [중국무협사]는 협의 유형을 발전 단계에 따라 유협과 호협으로 구분한다. 그에 따르면 유협은 춘추에서 전국에 이르는 발생기의 협을 가리키고, 호협은 전한 시기 무예를 숭상하는 풍조 속에서 강성해진 전성기의 협을 가리킨다. 민간에서 발생하여 순박한 무품을 계승하고 세류에 부합하지 않는 순수성을 보존하고 있던 유협이 상층사회의 의도적인 개입에 의해 변질되어 호협을 중심으로 파벌화, 세력화하였다는 것이 진산의 주장이다. 따라서 그는 유협과 호협이라는 말을 민간의 협과 귀족화된 협이라는 말과 등치시켜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분류법은 지나친 계급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다. 협은 원래 문사들이 중심이 되는 역사에서 밀려나 감추어진 주변적 존재이다. 버려진 그대로의 본질을 지키느냐, 본질을 접어서라도 중심에 가까워진 실력을 행사하느냐, 그 선택은 음양의 원리에 의해 주변부가 되어버린 칠실의 생존 전략에 달려 있었다. 여기서 유협과 호협의 구분은 민간과 귀족, 계급의 문제라기보다는 차라리 개인적 존재로서의 '나'와 사회적 존재로서의 '나' 사이에서 방황하는 인간적 딜레마와 관계된다. 유별난 자존을 가진 개인으로서의 자아를 먼저 지킬 것인가, 타협하는 중용의 도리를 배워 실력 있는 사회적 존재가 될 것인가, 협으로 산다는 것은 먼저 그 갈림길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로부터 시작한다. 

 

협(俠)으로 산다는 것 


임협, 협으로 산다는 것은 그에 마땅한 행위를 실천한다는 뜻이다. 협은 실존적으로 주어지는 존재가 아니라 특정한 양식의 행위를 수행함으로써 완성되는 실천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 행위의 핵심이 바로 '신의'이다. 신이라는 글자의 원래 형태는사람의 입에 가시를 꽂는 모양의 상혀아라고 한다. 그 그림의 뜻은 말한 바를 지키지 못하면 벌을 받는다는 것이다. 의라는 글자는 갑골문에서 끝 부분에 갈고리 모양의 장식이나 깃털을 단 아형의 의장용 무기를 가리켰다. 이 무기는 실질적인 용도로 쓰인 것이 아니라 의례의 위용을 더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점차 '인위적이다' 혹은 '본래의 것이 아닌(꾸며낸)', '엄숙한 의례·규범에 들어맞는 행위' 등으로 그 뜻이 확대되었다. 그러므로 '신의'는 뱉은 말을 반드시 지키는 것 그리고 규범에 들어맞는 행위를 의미한다. 실천적 존재인 협에게 어떤 일을 수행하는 데 있어 '틀림없다'는 믿음은 곧 존재에 대한 믿음이었다. 


'나는 아는 것'과 '나를 알아주는 것'은 다르기 때문에 알아주는 것, 그 존재를 믿어주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누구보다 유별난 자존을 가진 존재, 협에게 있어 그것은 인간관계의 필요조건이었다. 협은 협다워야 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협이라는 것은 실질적인 행위, 신의로만 증명될 수 있다. 행동으로 증명된 것은 누구라도 알 수 있다. 협의 행위는 신의를 위함이다. 신의라는 것은 행동으로써 자기를 증명하는 것이다. 그 행위를 부정한다는 것은 결국 자존을 부정한다는 뜻이다. 협이라는 존재는 언제나 '지기'와 '비지기'라는 두 세계 사이를 떠돈다. 


자기 존재에 대한 전면적 긍정, 그것을 지기라 부른다. '나를 알아주는' 지기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한다. 이때 그 행동이 합리적인지 아닌지, 세상의 상식에 부합하는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협에게 있어 행위에 대한 믿음은 존재에 대한 믿음과 일치한다.


영웅의 이름으로


협의 존재는 행위에 의해 증명되며, 존재가 증명되면 세상에 이름이 난다. 그런 까닭에 협이 이름을 얻는 것은 자기 존재를 세상에 증명하는 일이다. 목숨을 바쳐 의를 지킨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사생취의'의 존재 증명은 자아의 실현, 그 자체로 목적이 되는 행위였다. 유명세에 따라서 협은 드디어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업'이 되었다. 협의 행위는 점차 규범화되고, 추종되고, 학습되었다. 누가 '나를 알아주기를'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지기를 만난다는 건, 하늘만 믿고 기다리기엔 너무 희박한 희망이었다. 사람들은 점점 '나를 알아줄 사람'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이제 협은 지기를 만나기 위해, 세상에 자신이 협이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존재를 증명해야만 했다. 자기 증명의 행위는 목적에서 수단으로 유별난 사존의 이상에서 전문 직업인의 심사기준으로 변했다. 협은 이제 '나 보란 듯' 남이 꺼리는 일을 대신 해주고, 법을 어겨서라도 남을 도와주고, 이름난 사람을 찾아가 싸움을 걸기도 했다. 이름을 날릴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한다. 협은 이제 몸을 죽여서라도 이름을 알리며 살 길을 찾는 직업인이 된 것이었다.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여 끼어들기에 성공해서 백 사람의 일을 해결하면 영웅이 된다. 천 사람의 일을 해결하면 호걸, 만 사람의 일을 해결하면 준걸이다. 호협의 리더십은 이렇듯 끼어들기의 성공 여부에 달려 있었다. 

 

인재강호, 사람이 있는 곳에 강호가 있다


살아있는 전설, 무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