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사 - 맛깔스런 글의 성찬으로 차린 조선 시대 맛의 식탁(안대회)
서문 - 성리학으로 차린 조선의 밥상
사대부, 어금니를 벌려 고기를 뜯다
1392년, 새 나라 조선이 들어섰다. 무엇이 달라졌을까? 변화는, 아주 미미했지만 밥상에 찾아왔다. '육식 금지'가 풀린 것이다. 지배층이 된 사대부 계층에게 '육식 금지 해제' 소식은 새 시대의 축포 소리였다. 그러나 패망국 고려의 부실 채권을 고스란히 승계한 조선은 축포를 너무 일찍 터뜨렸다며 속도 조절에 나섰다. 백성들의 밥그릇은 여저힌 비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은 황급히 사대부의 육식 열풍에 찬물을 끼얹었다. '혁명'의 후퇴를 막자면 블랙홀 같은 지배층의 목구멍을 통제해야 했다. 첫조치가 '소 도살 금령'이다. 그뿐 아니라 조선 정부는 고려 정부와는 차원이 다르게 밥상을 전면적으로(?) 통제했다. 이른바 '성리학적 밥상론'이 등장한 것이다. 조선은 성리학의 명분론을 앞세워 밥상을 차별했다. 조선의 지배층은 최소한 고려의 귀족처럼 탐욕스럽지는 말아야 했다. 그래서 조선의 지배층은 탐욕을 감추기 위해 성리학의 '예'로 자신을 포장했다.
이덕무의 '소박한 밥상'론 : 참다운 미식가는 절제할 줄 안다
조선 왕들의 식치 퍼포먼스
조선 시대 왕들의 통치술 중에 '식치'가 있다. 식치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음식이 가장 좋은 약'이라는 한의학의 건강철학이다. 다른 하나는, 왕이 검소한 식생활을 보여서 민심을 얻으려 했던 통치술이다.
탐식가도 가지가지, 이유도 가지가지
1장 - 우심적, 존경하는 선비에게 바치는 음식
우심은 왕희지에게 대접함이 좋으리
우심은 소의 심장이다. 때로는 염통과 간까지 우심이라 부르기도 한다. 우심적은 진나라의 주의가 소 염통을 구워 누구보다 먼저 왕희지에게 주었다는 고사가 담긴 음식이다. 그 뒤로 우심적은 덕망이나 학식이 높은 사람이나 지인에게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대접하는 명예로운 음식으로 선비들 사이에 퍼졌다.
천하 명소 팔백리박의 심장을 구워 먹은 왕제
우심적은 왕희지 이전부터 존재했던 음식으로, 그 유래는 보여주는 고사가 있다. 진나라의 부호였던 왕개는 '팔백리박'이라는 이름난 소가 있었다. 어느 날 또 다른 부호 왕제가 왕개를 찾아가 내기를 청했다. 왕개는 선뜻 내기에 응했다. 설마 왕제가 정말 팔백리박에게 활을 쏘겠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 자신의 소가 화살 한 방에 죽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왕제는 서슴없이 활을 쏘았고, 팔백리박은 그 자리에 쓰러져 죽고 말았다. 하인들이 팔백리박의 배를 갈라 심장을 꺼나 오자 왕제는 숯불에 구워서 단 한 점만 맛보고는 유유히 자리를 떴다. 왕제는 지극히 사치스럽게 맛 좋은 음식만 차아다녀서 미식가의 대명사로 불렸다. 이 일화는 [진서]의 '왕제열전'에 실려 있는데, 왕제의 호탕한 기개를 칭송하는 이야기로 널리 퍼였다. 그 뒤로 우심구이(우심적)는 사나이의 기개를 상징하는 음식이 되었다.
헛된 칭찬은 우심을 욕되게 했네, 서거정
소 염통 구워 먹는 게 부추밭 가꿈보다 낫다, 정약용
'왕희지의 당일적을 받았으니', 권근
우심적을 천하제일의 요리로 꼽은 김문
우심적은 소의 염통을 얇게 저며서 양념간장으로 간을 하여 구운 음식이다. 양념간장은 간장에 배·설탕·다진 생강·마늘·파·참기름·깨소금·후춧가루를 넣어 만든다.
부친 상중에 우심적을 먹은 채수
2장 - 우금령, 탐식가들의 입을 봉쇄하라
1668년 청계천 장통교 살인사건
육식 열풍, 조선을 강타하다
육식 문화는 원나라의 지배를 받으면서 지배층 사이에 되살아났다. 소고기 소비량이 점점 증가했고, 소에 대한 인식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농우'가 식욕의 대상으로 바뀐 것이다. 그러다가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은 조선이 들어서자 유례가 없었던 소고기 열풍이 사회를 강타했다. 소는 유교식 제례에서 천자의 제상에 올리는 희생이기 때문에 육류 중에서 가장 지위가 높다. 조선 사대부들이 소고기를 귀히 여긴 까닭은 바로 거기에 있다. 조선 사대부들에게 소고기는 고귀한 신분과 지위의 상징이었고, 문화인이라는 자부심을 느끼게 해 주는 음식이었다. 세종은 소에 대해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다. 금살보감을 설치해서 소 밀도살을 감시·처벌했고, 도살 현장을 신고한 사람에게 도살범의 재산을 보상금으로 주는 '소파라치' 제도를 시행했다. 그러나 정작 세종 본인은 육선(고기반찬)이 없으면 밥을 먹지 못할 정도로 고기를 좋아했다. 세종이 육류 편식 습관은 부친 태종이 탄식할 정도로 심각했다.
우금령은 잘 지켜졌을까?
우금령이 실효를 거두지 못한 또 다른 원인은, 19세기에 이르러 소가죽 수요가 증가한 데 있다. 특히 일본과 청에서 조선산 소가죽 수입이 부쩍 증가했다.
단군 이래 최악의 우역이 전국을 삼키다
조선 사람들의 유별난 소고기 사랑
왜 조선 사람들은 육류 중에서 유독 소고기를 고집했을까? 그 까닭은 맛도 맛이거니와 키우는 데 드는 비용 때문이기도 하다. 소는 초식동물이라 먹이에 큰 돈이 들지 않는다. 사방에 널린 게 풀이다. 겨울에는 볏짚·콩깍지·건초 등 농업 부산물을 멀이면 된다. 그러나 돼지는 다르다. 잡식동물이고 사람과 거의 식성이 같다. 비싼 곡물을 먹여야 살이 찐다. 사람이 먹을 곡물도 모자란 판에 어떻게 돼지에게 먹이겠는가. 그래서 조선 시대에는 돼지고기가 소고기보다 비쌌다.
천자의 나라에 세운 학교는 벽옹이라 했고, 제후의 나라에 세운 학교는 반궁이라 했다. 반민이란 반궁(성균관) 근처(반촌)에 사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성균관에 속한 노비들인데, 고려 성리학자 안향이 성균관에 헌납한 노비(100명)의 후손이었다.
3장 - 난로회, 양반들의 소고기 탐식 풍속
천자의 나라에 세운 학교는 벽옹이라 했고, 제후의 나라에 세운 학교는 반궁이라 했다. 반민이란 반궁(성균관) 근처(반촌)에 사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성균관에 속한 노비들인데, 고려 성리학자 안향이 성균관에 헌납한 노비(100명)의 후손이었다.
음력 시월 초하루는 고기 먹는 날
조선 시대에 '고기 먹는 날'이 있었다. [동국세시기](1849)에 따르면, 서울 풍속에 음력 10월 초하룻날, 화로 안헤 숯을 시뻘겋게 피워 석쇠를 올려놓고 소고기를 기름장·달걀·파·마늘·산초가루로 양념한 후 구우면서 둘러 앉아 먹는 것을 '난로회'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고대 중국의 풍속을 다룬 [세시잡기]에 난로가 나온다. 북경 사람들이 10월 초하루에 술을 걸러 놓고 화로에 둘러앉아 고기를 굽고 마시는데, 그것을 난로라 한다고 했다. 또한 남송 시대의 박물지 [동경몽화록]에도 10월 초하루에 유사(관리)들이 난로와 술을 올리라고 하면 민가에서는 모두 술을 가져다 놓고 난로회를 했다고 한다. 난로회 풍속이 조선에 언제 들어왔는지는 알 수 없다.
규장각 신하들과 난로회를 즐겼던 정조
난로회는 조선 후기에 수도권을 중심으로 식자층에 빠르게 확산되었다. 심지어 왕과 신하가 궐 안에서 함께 즐기기도 했으므로, 그 뒤로 양반층에 유행처럼 번졌을 것이다. 난로회의 유행은 우금령이 유명무실해졌음을 보여 준다. 우금령은 여전히 법적인 효력이 있었으나 예전처럼 강력한 단속과 처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형벌 대신 속전을 징수했던 것이다.
소고기, 어떻게 요리해 먹었을까?
한국 전통음식은 조선 시대에 이르러 조리법이 크게 발달했다. 육류를 비롯하여 향신·조미료가 다양해지기도 했지만 제례문화가 확산된 영향이 크다. 성리학이 생활규범으로 뿌리를 내리면서 제례음식은 음식문화의 총아로 떠올랐고, 가문 고유의 '손맛'도 탄생했다. '설약멱'은 개성 사람들이 예로부터 즐겼던 음식이다. 구한말 문신 최영년(1856~1935)의 [해동죽지[(1925)에는 '설리적'으로 소개되어 있다. 설리적은 소갈비나 염통을 기름과 훈채(마늘, 생강)로 조미하여 숯불이나 화로에 구워 먹는 음식이다. 그런데 굽는 방법에 비결이 있다. 굽다가 반쯤 익으면 냉수에 잠깐 담그는 것이 비법이다. 그것을 '냉침법'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식한 고기를 다시 구우면 겉이 타지 않고 속까지 잘 익는다. 냉침법은 개성 사람들이 굽던 고기를 눈밭에 던졌다가 다시 구웠던 데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설야멱'이란 이름은 중국 고사에서 비롯한 것이다. 순조 때 조재삼이 쓴 [송남잡지]에 "송 태조가 설야에 보를 찾아가니 숯불에다 고기를 굽고 있더라'라는 고사가 소개되어 있다. 보는 송 태조 조광윤의 친구인 조보를 가리키는데, 조광윤이 송을 개국한 뒤 초대 재상을 지낸 인물이다. 조리법이나 맛이 특별해서보다는 송 태조와 보, 주군과 신하 관계가 된 이후에도 이어진 소탈한 우정이 그럴싸해서 후세의 선비들이 '화로구기'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것이 아닐까? 설야멱은 음식 자체로는 소박하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는 매우 웅대하고 멋스러우며, 성리학적이기까지 했다.
양반들 입을 '열광의 도가니'로 만든 열구자탕
열구자탕을 요즘엔 '신선로'라고 부른다. 여러 가지 생선과 고기를 채소와 함게 끊인 음식인데, 재료를 색깔별로 담아 놓은 모양새가 눈을 먼저 즐겁게 한다.
조선에서 으뜸가는 소고기 탐식가, 김계우 부부
4장. 가장, 시대부 양반들의 개고기 사랑
가장을 먹다가 요리사를 죽인 강원 감사
혜경궁 홍씨 생일상에 오른 '개고기찜'
개고기를 먹게 된 것은 조선 건국이 가져온 변화였다. 고려 시대에는 불교 때문에 육식이 어려웠다. 개고기는 조선 건국 이후 서민들의 단백질 공급원으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비단 서민들뿐 아니라 양반들도 개고기 맛에 푹 빠졌음을 옛 책에서 발견할 수 있다.
개고기는 피를 씻으면 냄새가 난다?
박제가가 정약용에게 가르쳐 준 개고기 삶는 법
개를 뜻하는 한자는 견·구·오·방 네 글자가 있다. 이 글자들은 각각 쓰임새가 달랐다. 견은 애완견이고, 구는 식용 개를 가리킨다. 고기 맛이 가장 좋다는 누렁이를 '황구'라고 부른 것에서 조선 사람들이 '견'과 '구'를 구분해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오란 크기가 4척이 넘는 사냥개이며, 방이란 삽살개 또는 작은 사냥개를 가리킨다. 예로부터 애완견을 애완구라고 부른 일은 없었다. 옛사람들도 식용 개와 애완용 개는 엄격히 구분을 했던 것이다. 애완견은 식용이 아니다.
연경에 간 심상규가 개장국을 즐긴 일
김안로의 개고기 식탐
여덟 가지 개 요리를 남긴 중인 실학자 이규경
구적, 개고기구이는 어떤 요리였을까? 조선 후기 중인 실학자 이규경(1788~1856)의 [오주연문장전산고](1850)에 구적 요리법이 기록되어 있다. 개고기구이는 비교적 손쉬운 요리로, 개고기와 대파의 흰 부분을 적을 하기에 알맞은 크기로 썰어서 양념하여 꼬챙이에 끼워 불에 구우면 된다. '구장과 해'는 삶은 개고기를 새우젓이나 조기젓에 찍어 먹는 것으로 돼지고기와 다를 바 없다라고 했으며, 구포는 포를 떠서 갖은 양념을 고루 발라 말리며 소기기와 같다라고 하였다. 구족초, 구미초, 구비순초는 각각 개의 발과 꼬리, 코와 입술을 볶은 것으로, 성균관 학생들이 맛있는 별미로 즐기는 요리라고 하였다.
5장. 두부, 다섯 가지 미덕을 갖춘 식품
중국인 열 중 아홉은 두부당?
두부는 기원전 2세기 무렵, 중국 한나라의 회남왕 유안이 발명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한나라 고조유방의 손자이다 유안은 두유를 즐겨 마셨는데, 두유로 불로장생의 명약을 만들던 중 실수로 두유에 식용 석고를 떨어뜨렸다. 그 순간 두유가 석고에 반응하여 응고되자 그 현상을 이용하여 두부를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석고의 주성분은 황산칼슘이다. 약간 다른 버전의 두부 유래도 전해지고 있다. 유안은 노자와 장자의 정치철학을 정리한 책 [회남자]를 쓴 도교의 대가여서 추종자들이 많았다. 유안은 제자들과 함께 팔공산에서 신선 수련을 하면서 두유를 즐겨 마셨다. 어느 날 두유에 소금을 넣고 마시다가 산에 남겨 두고 내려왔는데 다음 날 보니 두유가 몽글몽글 엉겨 있었다. 콩 단백질이 소금에 포함된 염화마그네슘(간수 성분)에 의해 엉기는 현상을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그것이 유안이 두부를 만들게 된 계기라고 한다.
목은 이색에서 소설가 최서해까지, 두부 500년사
982년, 왕위에 오른 성종이 "미음과 술과 두붓국을 길 가는 사람에게 보시"[고려사절요]했다고 한다. '보시'라는 말에서 느낄 수 있듯이, 두부는 사찰에서 만들어 부처에게 공양하던 귀한 음식이었다. 두부가 주로 사찰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은 고려 왕실이 '조포사'를 지칭했던 것에서 확인된다. 조포사란 왕실이 궁중 행사나 제향에 쓰일 두부를 위탁해서 만들던 사찰이다. 당시 두부 제조 기술은 오래된 사찰들의 '전매특허'였음을 보여준다.
명 황제도 감탄한 조선의 두부 맛
두부가 가진 다섯 가지 미덕
조선 시대에도 두부는 서민들이 먹기 힘든 음식이었다. 콩을 갈고 콩물을 짜는 데 힘도 많이 둘뿐더러, 서민들은 두부를 만드는 방법도 잘 몰랐다. 방법을 알아도 부드러운 두부를 만들기는 어려웠다. 사대부들은 두부를 오미(다섯 가지 미덕)를 갖춘 음식이라 했다. 맛이 부드럽고 좋음이 일덕이요, 은은한 향이 이덕이요, 색과 광택이 아름다움이 삼덕이요, 모양이 반드함이 사덕이요, 먹기에 간편함이 오덕이라는 것이다.
연포회, 양반들이 절간으로 달려간 까닭
양반들 등쌀에 중 노릇도 못할 판
실학자 성호 이익의 지극한 콩 사랑
추사 김정희가 꼽은 최고의 음식은?
6장. 순챗국과 농어회, 사대부들이 동경했던 귀거래의 아이콘
사대부들에게 귀감이 된 '장한의 홍취'
순채는 중국이 원산지인 수련과의 여러해살리풀이다. '순채의 가을 맛'이란 무엇일까? 이는 중국 진나라 장한의 고사를 두고 한 말이다. 동진 오군 사람 장한이 낙양에 들어가 제왕 밑에서 벼슬을 하던 중, 가을바람이 불어오자 문득 고향의 순챗국과 농어회가 생각났다. 그 순간 장한은 인생이란 가난하게 살아도 내 뜻대로 사는 것이 좋지, 어찌 벼슬을 하기 위해 고향을 떠나 수천 리 밖에 몸을 얽매일 필요가 있겠느냐하고는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시인들은 장한의 귀향을 선비가 마땅히 지녀야 할 청빈한 마음씨로 높이 평가했고, 시와 그림으로 그의 행적을 기렸다. 순챗국과 농어회는 사대부나 산림처사를 막론하고 청빈한 삶을 노래하는 이들이 공통으로 읊조렸던 시어이자 영원한 메타포였다. 순챗국과 농어회는 벼슬살이에 지친 사대부들에게 귀향을 생각하게 하는 음식이자, 그 맛을 설사 탐하더라도 허물이 되지 않을 청빈 음식이었고, 안빈난도의 삶에 허용된 '착한 사치'였다.
가장 맛 좋은 순채는 '천리 순갱'
서거정은 순채의 시인
조선의 순채 요리는 왜 사라졌을까?
조선 선비의 농어회 먹는 법, 금제작회
다산, 송강 농어의 정체를 밝혀 내다
장한처럼 지금 곧장 노나라로 저어 갈거나
7장. 허균, 조선 최초의 음식 칼럼니스트
나는 평생 먹을 것만 탐한 사람
허균이 탐식형 인간이 된 내력
허균은 천지간의 한 괴물입니다
도문대작, 조선 최초의 음식 품평서
주류 사회와의 불화, 그것이 허균이 조선 최초의 음식 칼럼니스트가 된 배경이다. 허균이 만약 원만하게 현실에 안주하여 관직 생활에 충실했다면 [도문대작]을 쓸 일은 없었을 것이다. [도문대작]은 허균이 조선 팔도의 명물 토산품과 별미 음식을 소개한 책이다. 책 제목은 '푸주간 앞에서 입을 크게 벌려 고기 씹는 시늉을 해 본다'는 뜻이다.
한 고을을 얻어서 입에 풀칠이라도 한다면
유배지를 선택할 때도 방어와 준치 타령
허균은 과연 혁명을 꿈꾸었을까?
8장. 정약용, 쌈으로 입을 속이며 채소밭을 가꾸다
내 좋아하는 건 오직 채소밭 가꾸는 것
나는 청빈으로 부호 귀족과 맞선다오
술의 정취는 살짝 취하는 데 있다
다산의 소박한 밥상: 두부ㆍ부추ㆍ토란ㆍ상추ㆍ쑥갓ㆍ겨자ㆍ명아주ㆍ비름나물
다산이 18년 귀양살이를 견딘 비결은 차
9장. 승기악탕, 조선 사람들을 사로잡은 일본의 맛
조선 승기악탕의 정체 : 닭찜인가, 도미면인가?
조선 속의 작은 일본, 왜관이 생긴 내력
왜관의 승기악탕, 그것의 정체는?
스기야키를 맛본 조선 사람들의 반응
10장. 조선을 찜 쪄 먹은 희대의 탐식가들
식전방장, 부호들의 호화로운 밥상
식전방장에 팔진미를 먹었다는 윤원형
탐식을 바라보는 시각은 크게 두 가지이다. 호방한 성격 또는 부도덕한 심성이다. 조선에서는 호방하다기보다 부도덕하게 여겼다. 특히나 지배층인 사대부의 탐식은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조선 시대 탐식가들의 위시리스트
중국 주나라에서는 맛있는 음식으로 여덟 가지를 꼽았다. 그것을 '팔진미'라고 하는데, 순오, 순모, 포돈, 도진, 지, 오, 간료가 그것이다. 순오는 '젓국을 달려 밭벼로 지은 밥에 얹고 그 위에 기름을 부은 것'이며, 순모는 순오를 본떠 만든 음식으로 밭벼 대신 기장밥을 쓴다. 포돈과 포양은 돼지나 양의 암컷을 잡아서 뱃속에 대추를 채우고 진흙을 발라 구운 것이다. 도진이란 소·양·사슴·노루·고라니의 등심살을 짓쩧어서 부드럽게 하여 삶은 요리이다. 지란 갓 잡은 소고기를 얇게 썰어서 좋은 술에 담갔다가 초와 젓, 매실로 담근 장을 곁들여 먹는 것이다. 오란 소고기를 엮은 갈대 위에 놓고 계피와 생강가루, 소금을 뿌려 말린 요리이다. 간료란 개 창자에 개 간을 넣고 구운 요리이다. 이상의 팔진미는 본디 노인을 봉양하는 여덟 가지 맛있는 음식을 뜻한다. 그런데 후대에는 팔진미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라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고, 왕조나 지역에 따라 꼽는 음식의 종류가 달랐다.
'동방의 갑부' 정사룡
주먹 하나로 부와 권력을 거머쥔 박원종
홍길동은 희대의 도적, 그의 형 홍일동은 대식가
다산의 9대조 정응두는 소문난 대식가
탐식을 빌미로 정적을 공격하다
금주령도 마셔 버린 술고래, 홍윤성
필탁의 주흥 : 오른손에는 술잔, 왼손에는 게 집게발
후기. 탐식은 현대사회에 가장 흔한 범죄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는 탐식의 유형으로 다섯 가지를 꼽았다. 시도 때도 없이 먹는 것, 너무 섬세한 요리(맛)을 추구하는 것, 너무 호화롭게 먹는 것, 절도 없이 게걸스럽게 먹는 것, 너무 과하게 먹는 것이 그것이다. 황교익은 탐식을 "맛있는 음식을 찾아다니며 먹는 것"이라 정의했고, 미식은 "음식에 담긴 삶을 맛보자는 것"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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