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행복과 21세기 공동체], 이동수 편, 아카넷, 2013, (140609).

바람과 술 2014. 6. 9. 00:09

서문 | 5 


제1장 행복과 탈근대적 공동체 | 이동수 

1. 서론 | 13 

미국독립선언문(1776)은 '행복의 추구'를 인간의 천부적 권리 가운데 하나로 선언했으며, 프랑스혁명 헌법(1793)은 '공공의 행복'을 사회의 목표로 설정했다. 그 후 행복은 근대국가의 궁극적인 의무이자 목적으로 간주되기에 이른다. 현실세계에서 자유주의와 자본주의에 근거한 근대국가는 이런 의무와 목적을 망각한 채 행복을 개인의 차원으로 퇴거시켜버렸다. 행복이란 '자유로운 욕구충족'이라 생각하고 개인에게 그 추구를 맡긴 것이다. 하지만 근대사회는 자유로운 욕구충족이 지나친 나머지 상호경쟁과 비인간화가 심화되고 이른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상태'로 전락해버렸다. 한편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점을 치유하기 위해 등장한 공산주의 사호 역시 인민을 행복으로 이끌기보다는 억압과 강제를 통해 불행으로 치닫게 했다. 그래서 19세기 아나키스트들은 근본적인 해결책으로서 강제적이고 착취적인 국가의 해체를 부르짖기도 했다. 하지만 국가의 강고함은 우리에게 행복을 제공해주지도 않으면서 아나키스트들의 주장을 무력화했으며, 그 결과 인간이 국가적 삶이나 사회적 삶을 피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런데 20세기 후반부터 국가적 삶이나 기존 사회생활과는 다른 종류의 공동체적 삶을 통해 행복을 추구하려는 시도들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는 두 가지 조류로 나타나는데, 협동공동체와 대안공동체이다. 전자는 기존의 지역사회에 거주하면서 그동안 부재했던 주민들 간의 협력과 협동을 풀뿌리 차원에서 이끌어내려는 시도를 의미하며, 후자는 새로이 대안적 공동체를 형성해 그곳에서 함께 행복한 생활을 추구하는 노력을 뜻한다. 그러나 이 공동체들이 국가나 기존의 사회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국가와 사회에 대한 자신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한편, 기존의 구성방식과는 다른 공동체(혹은 공동체 네트워크)를 만들어 행복의 욕구를 충족하려 할 뿐이다.  


2. 행복과 공동체 :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 | 16 

행복이란 그리스어 eudaimonia가 뜻하는 것처럼 '잘된 삶' 혹은 '좋은 삶'을 의미한다. 고대 그리스 사상가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인간이 추구하는 최고의 선으로 간주한다. 그렇다면 최고선으로서 행복한 삶의 요소는 무엇일까? 외부적 선(혹은 재화들, external goods)을 얼마나 갖고 있는지가 행복의 관건이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외부적 선이란 부, 건강, 외모, 권력, 장수, 자식, 사회적 명예 등을 일컫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쾕을 제외한 외부적 선 대부분이 행복의 필요조건임을 인정한다. 행복해지려면 최소한의 외부적 선이 어느 정도 충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에 비례해 행복의 양이 증가한다고는 보지 않는다. 행복에는 외부적 선 이외에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인 플라톤과 그의 전통을 따르는 대부분의 헬레니즘 사상가들은 외부적 선 이상의 것을 정신적 가치에서 찾는다. 요컨대 자신의 내부에 있는 성격, 즉 외부적 선에 대한 욕망과 이와 결합된 쾌와 고통의 정념을 정복할 수 있는 성격을 자기 스스로 창출할 때 행복의 길이 열린다는 것이다. 플라톤의 뒤를 이은 스토와 사상가들에 의하면 불행의 원인은 우리 내부에 있는데 선과 악에 대한 잘못된 판단, 그리고 이와 직접적으로 결부된 욕망과 두려움에서 비롯한다고 본다. 인간의 행복은 이런 정념들로부터의 해방에서 온다. 그래서 스토아 사상가들은 잘못된 판단과 정념으로 채워진 자아를 버리고 새로운 자아를 설계할 것을 요구한다. 에피쿠로스 학파 역시 인간의 욕망은 인위적인 것이며 따라서 행복해지려면 공허한 욕망으로 가득 찬 자아를 해체하고 그것을 자연적이고도 꼭 필요한 최소한의 욕구만으로 구성된 자아로 대체하라고 권고한다. 또한 회의론자들은 자신의 내부에서 행복을 위해 판단하려는 일체의 경향과 어떤 무엇을 선으로 욕망하려는 일체의 경향을 모두 제거하라고 주문한다. 그리고 이런 자아의 구성이 그 자체 평정의 상태가 되며 이것이 바로 행복이라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정신적·관조적 삶의 중요성에 공감한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관조적 삶 외에 정치적 삶을 행복의 중요한 요소로 간주한다. 왜냐하면 정치적 삶도 관조적 삶만큼이나 자기 충족성을 추구하며 그 속에서만 외부적 선을 충족시키고 관조적 삶을 가능하게 하는 정치적 덕이 생기기 때문이다. 특히 『정치학(politics)』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폴리스(polis)가 자연적으로 최고의 자기충족성(aurtarchy)과 최종성(teleion)을 갖고 있어서 우리가 폴리스 시민으로 살아갈 때에만 최고의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설파한다. 그런 점에서 인간의 최종 목적은 정치적 삶에 있다. 즉 폴리스는 불완전한 개인들이 모여 상호작용과 협력을 통해 자기충족성을 제공하는 집합적 선인 셈이다. 폴리스가 없다면 인간은 자신의 생존과 생활, 그리고 외부적 선을 충족시키느라 분투하면서만 일생을 마감할 것이다. 오직 폴리스 속에서만 인간은 최고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 행복을 얻을 수 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자기충족성을 독립이나 고립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폴리스에 거주하는 시민들은 남들로부터 완전히 고립하거나 독립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폴리스의 한 부분으로서 다른 사람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자기충족성을 성취해야 한다. 또 다른 주의점은 자기총족성을 위해 폴리스에서 정치적 삶을 산다는 것이 자기 자신을 버리고 공동체 전체만을 위하라는 뜻은 아니다라는 점이다. 인간이 정치적 동물이라는 것은 혼자서는 살 수 없으며 따라서 살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과 유기적으로 얽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한편 폴리스에서 정치적 삶을 사는 사람들은 폴리스가 제공하는 외부적 선을 어느 정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폴리스 안에 잇다는 것은 안정적으로 물자를 공급받을 수 있다는 물질적 조건을 충족시킬 뿐만 아니라 폴리스의 문제, 즉 공적이고 정치적인 문제에 참여하여 실천적 지혜를 발휘할 수 있고 정치적 덕을 육성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폴리스가 하는 일은 관조적 삶이 추구하는 여가 그 자체가 아니며, 그것을 얻기 위해 여러 종류의 일을 하는 것과 더욱 연관된다. 즉 정치적 삶이란 먼저 필요한 외부적 선을 확보해야 하는 수단적 성격을 갖는다. 그런 점에서 정치적 삶은 여가를 얻기 위한 삶일지언정 여가 활동 그 자체는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민들에게 정치적 삶을 살도록 권장하면서도 행복을 위해서는 여전히 관조적 삶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즉 시민들은 때로는 정치적 삶에 집중해야 하고 또 때로는 관조적 삶에서 여가를 가져야 한다. 이를 위해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안하는 제도적 장치는 정치적 지위와 관직의 정기적 순환이다. 일정한 시간을 두고 관직을 순환시키는 것은 시민들이나 정치인들이 정치적 목적을 오해항 기왕의 정치에 매몰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또한 정기적으로 여가의 생활로 돌아오는 것은 관조가 최고의 즐거움이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관직의 순환을 통해 여가가 보장되었다고 해서 모든 시민들이 관조적 삶을 성공적으로 사는 것은 아니다. 이를 위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민들에게 오랜 교육을 통해 준비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하는 행복이란 삶의 세 차원을 동시에 만족시킴으로써 자기충족성을 갖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인간은 외부적 선의 충족을 필요로 한다. 둘째, 관조적 삶이야말로 세속적인 것의 변화에 상관없이 자신의 욕구를 조절해가며 여가를 누릴 수 있는 것으로 행복을 위한 최종적 단계의 삶이다. 셋째, 개인들이 함께 사회를 형성하여 외부적 선을 집합적으로 조달하고 관조적 삶의 차원을 즐길 수 있도록 하는 정치적 삶이 필요하다. 넷째, 결국 행복을 위해서는 앞의 세 차원이 함께 만족되어야 하며 이는 정치적 삶의 중요성을 부각시킨다.  


3. 탈근대적 공동체와 행복 : 핀드혼의 사례 | 24 

탈근대사회 대안공동체는 유토피아 추구가 아니라 근대성으로부터의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며, 근대적 삶과는 다른 대안적 삶에 대한 욕구의 실험이다. 하지만 이 실험도 다른 사람들의 공감을 얻고 통할 수 있어야만 대안공동체가 지속적인 공동체로 살아남을 수 있다. 오늘날 탈근대적 가치와 삶을 추구하는 '대안공동체'는 현대사회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돌파구를 찾기 위해 대안적인 다양한 종류의 실험적·정신적·교육적 생활공동체를 지향한다. 19세기 공동체들은 유토피아라는 이상향을 바라보면서 국가에서 탈퇴함으로써 기존 사회와의 단절을 시도했다. 그러나 오늘날 대안공동체들은 국가와의 단절을 전제하지 않는다. 또 폐쇄된 공간으로서 자신들만의 유토피아적 목표를 추구하지도 않는다. 핀든혼은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세 종류의 조직으로 구성된다. 공동체 자체는 비영리법인인 핀든혼 재단(Findhon Foundation)으로 등록되어 있으며, 이외에 교육프로그램을 제공하는 핀든혼 칼리지(Findhon College)와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조직이 따로 있다. 이렇게 여러 조직이 있는 이유는 공동체 유지를 위해서는 교육이 가장 중요하고, 현실적으로 공동체가 당면한 가장 어려운 문제가 바로 경제문제여서 영리를 추구하는 조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공동체적 삶을 살기는 하지만 핀든혼 생활은 비교적 자유롭다. 주민들에게는 공동체보다 개인적 삶이 더 중요한 문제다. 특히 핀든혼은 '튜닝(tuning)'을 강조하는데, 이는 영성의 소통을 위해 개별성 외에 상호 간의 튜닝으로 공동체 의식을 갖도록 하려는 것이다. 핀든혼 공동체를 규율하는 규칙은 두 가지다. 불법 약물을 복용할 수 없다는 것과, 여러 사람이 있는 장소에서 흡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규칙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핀든혼의 탈정치적 원칙이다. 핀든혼이 중시하는 가치는 정치적 이념보다는 영성(spirituality)과 생태(ecology)다. 영성이란 어느 특정 종교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내가 곧 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인데, 이럴 때에만 인간이 '총체적 사고'를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생태데 대한 강조는 에코하우스의 건설을 유도하는 데서 볼 수 있다. 핀든혼의 가장 큰 어려움은 경제다 주민들이 종사하는 일은 대체로 농업과 소매업 등인데 이것만으로는 공동체 경제의 성장을 유도하기가 어렵다. 내부적 유통을 개선하기 위해 지역화폐를 사용하고 대안경제를 모색하기도 하지만, 일터가 없어 찾아온 사람들에게 집과 일을 제공하고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영리적 활동이 절실히 필요하다. 따라서 핀든혼은 비영리법인인 핀든혼 재단 외에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기업들을 공동으로 만들거나 혹은 외부인의 영리활동을 허락하고 수입을 배분받는다. 요컨대 핀든혼은 개별성과 다양성을 보존하면서 영성을 키우고 자연 및 타인과 소통하고 협동하는 곳이다. 이때 중요한 것이 문화와 교육이다. 다시 세상으로 나아가 그동안의 핀든혼적 삶의 방식을 지속하려면 그 문화를 체화시켜야 하는데, 이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교육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교육은 문화를 창조하는 데서 중요한 촉매제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것이 핀든혼이 핀든혼 칼리지라는 또 하나의 조직을 갖고 있는 이유다. 핀든혼에서의 교육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지속가능한 삶을 추구하는 교육"이라고 말한다. 이런 지속가능한 삶을 위한 교육에서는 개인적 성공을 위한 교육보다는 함께 사는 방법에 대한 교육을 중시한다. 일반적으로는 교육을 통해 지식을 습득하고 그것을 시험과 취업 그리고 자신의 성장을 위해 사용하는데, 실제 우리 삶에서 가장 필요한 교육은 타인과 어떻게 함게 살 것인지, 자연과 어떻게 더불어 살 것인지, 타인이나 자연을 해치지 않으면서 기술을 어떻게 유용하게 사용할 것인지 등에 관한 것이다.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는 공동체의 규모를 키우는 것이다. 즉 경제적 자기충족성을 충족시킬 만한 자체의 생산 및 소비 단위를 형성할 필요가 있다. 대안공동체의 크기는 항상 '인간적 규모'여야 하는데, 이것은 결국 대안공동체가 대면집단의 성격을 갖는 일차적 집단과 같은 공동체여야 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규모로서는 경제적 자기충족성을 갖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이는 대안공동체 대부분이 직면한 경제적 삶과 관조적 삶, 그리고 정치적 삶의 균형에 대한 근본적인 어려움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대안공동체는 그 자체로 자치충족적인 공동체가 될 수는 없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대안공동체가 기존의 사회를 대체하는 기제가 아니라 보완하는 기제라는 자기인식이 필요한 이유다.  


4. 결론 | 36


대안공동체 옹호자들은 인간이 본성적으로 질서와 조화를 지향하며 교육과 계몽을 통해 본성에 충실한 삶을 살 수 있다고 가정하는데, 이는 지나친 장밋빛 전망이다. 정치는 자율설뿐만 아니라 강제성 혹은 공권력을 필요로 하며.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 두 측면이 모두 고려되어야 한다. 또한 대안공동체가 영성과 생태주의 등 높은 수준의 정신적 가치에 주목하고 유지하기 위해 교육과 계몽성을 강조하는데, 이 역시 참여자를 제한하는 문제점이 있다. 우리는 대안공동체의 일차집단적 성격을 탈정치화의 시도라기보다는 이미 도시화된 현대사회에서 대면집단적 공동체가 제공하는 삶의 양식을 다시 체험하고 그 기억을 되살리는 촉매 역할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대안공동체는 단순히 기존 사회에 대한 대안이 아니다. 이미 이차집단화된 현대사회 속에서 다시금 일차집단에 대한 추억을 '상기(recollection)'함으로써 현대사회에서 정치적 덕을 육성하고 새로이 정치적 삶을 재편하려는 실험적 노력인 것이다. 대안공동체가 순기능적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그 자신을 일종의 '비어 있는 공간'으로 간주해야 한다. 즉 공동체는 있되 주인은 없고 계속 머물러 있는 사람도 없는 휴게소와 같은 곳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대안공동체는 사회 속에 존재하는 일종의 '비어 있는 공간'이다. 그리고 어느 정도 비워지면 다시 세상으로 되돌아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이 순환이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것이다. 

제2장 한국 풀뿌리공동체운동의 풍경들: 협동과 자치가 만들어낸 풀뿌리공동체 | 김현 

1. 서론 | 41 

2. 삶을 바꾸는 풀뿌리공동체의 다양한 표정들 | 44 

'시민대학'은 몇 가지 우수한 장치들이 있다. 첫째,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전문가들은 현장과 긴밀하게 호흡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둘째, 이 교육은 토론하고 협의하는 쌍방향 형식을 취한다. 셋째, 이 교육방식의 핵심은 '찾아가는 교육'에 있다. 넷째, 교육이 끝나면 주민들은 소모임을 만든다. 


3. 성미산 마을공동체 | 57


성미산 싸움은 세 가지 측면에서 성미산 마을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었던 동력이다. 첫째, 성미산 싸움은 자치적인 삶을 터득하는 계기였다. 자치의 문제는 기존제도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문제가 아니라 자신 삶의 현장에서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능력을 실질적으로 개발하는 문제라고 했을 때, 성미산 싸움은 주민으로서의 실천적 행위를 자극하는 좋은 계기였다. 둘째, 그야말로 공동체라고 부르는 일정한 가치를 공유하는 집단이 형성된 것이다. 셋째, 세상에 말을 걸었다는 점, 즉 주민과의 면대면 접촉이 공식적으로 이루어지면서 마을과 이웃이 된 것이다. 


공동육아협동조합이 결사체로서 가지고 있는 속성

 생활형 의제    참여 시스템    의제의 연속성    정주의식 발현
 보육은 생활의 가장 치열한 의제  →  학부모들의 일상적인 참여로 '공동육아'의 실현   →  아이들의 성장에 따라 부모의 관심도 함께 변화   →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정주의식 발현 


4. 결론 | 67 

제3장 자립의 행복과 한국의 협동공동체 | 하승우 

1. 서론 | 69 

2. 대안적인 발전과 자급의 행복 | 73 

세계은행은 지속가능성을 다음의 네 가지 요소로 정의한다. ① 인간적 지속가능성 : '인간자본'을 유지하는 것을 뜻하고, 건강, 교육, 기술, 지식, 지도능력, 서비스에의 접근 등으로 구성된다. ② 사회적 지속가능성 : '사회자본'을 유지하는 것을 의미하고, 사회를 위한 근본 틀을 창출하는 투자와 서비스를 지칭한다. ③ 경제적 지속가능성 : '경제자본'을 유지하거나 혹은 그 자본을 본래대로 존속시키는 것을 뜻하고, 보통 재정적·경제적 계산으로 환원되는 것을 가리킨다. ④ 환경적 지속가능성 : '자연자본'을 유지하는 것을 의미하고, 물, 땅, 공기, 생태체계의 서비스 등으로 이루어진 자연자본은 많은 부분을 경제자본으로 전환한다. 


마리아 미스는 자급을 실현할 실천 방향을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① 경제활동의 목표는 익명의 시장에서 상품과 화폐(임금 혹은 이윤)를 산더미처럼 많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창조하는 것 또는 생명을 재창조하는 것이다. ② 이러한 경제활동이 자연과 사람들 사이에 개로운 기반을 마련한다. 모든 생명체의 생존이 존중받고 지배-복종보다 보살핌과 호례성, 상호의존성, 나눔과 보살핌 같은 관계들이 형성된다. ③ 자급의 관점은 참여민주주의 또는 풀뿌리민주주의에 뿌리를 두고 그런 활동들을 지원한다. 자연히 정치와 경제,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 간의 구분은 대부분 폐기된다. ④ 자급의 관점은 반드시 다면적 효과나 시너지 효과를 낳는 문제 해결방식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환경문제와 함께 사회문제도 해결되어야 한다. ⑤ 자급의 관점은 과학·기술 지식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한다. 기존의 도구적이고 환원주의적인 과학기술을 버리고 여성과 민중에 기반을 두는 풀뿌리 지식과 과학, 그 전통의 의미를 재평가한다. ⑥ 자급의 관점은 문화와 노동의 재결합, 부답으로서의 노동과 즐거움으로서의 노동의 재결합을 이끌어낸다. 이러한 노동의 재결합의 목표는 행복과 충문한 삶이다. ⑦ 자급의 관점은 물이나 공기, 쓰레기, 토양, 자원 등의 공유재산을 사유화하거나 상업화하는 데 반대한다. ⑧ 모든 생명체의 상호연관성, 일상적 실천과 경험적 윤리, 수단과 방법의 일치를 전면에 내세우는 정치개념은 에코페미니즘의 사회개념과 어울린다. 자급의 관점은 남성들이 지국의 생명을 창조하고 보존할 책임을 실제로 분담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재정의할 것을 요구한다. ⑨ 생명의 창조 및 보존과 상품 생산의 이분법이 폐지되고 남성들이 지금까지는 여성의 영역으로 여겨온 보살피고 양육하는 자질을 갖게 된다면, 그리고 자립과 호혜성과 자급에 기초한 경제에 여성과 함께 남성들도 생산에 참여하다면, 그들은 파괴적 전쟁을 일으킬 시간이나 의향을 버리게 될 것이다. 


3. 자급의 공동체와 행복 : 원주의 사례 | 88 

4. 결론 | 95 

제4장 자유와 행복, 그리고 대안공동체 | 이화용 

1. 서론 | 101 

2. 68운동 | 104 

월러스틴은 68운동이 남긴 큰 유산은, 곧 중도 자유주의의 폐위와 세계적 정치투쟁에서 민중의 등장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월러스틴과는 달리, 보수주의 정치세력은 기존 권위의 도전과 거부, 곧 반권위주의라는 이른바 좌파 정치 문화의 출발이 68운동에서 이루어졌다고 보고 이를 68운동의 유산으로 주장하기도 한다. 


인간 이성과 진보에 근거하는 근대 기획과 근대 국민국가에 대한 도전, 특히 대학생들의 대학 당국과 사회에 대한 비판은 68운동을 기존 정치제도에 대한 보다 구체적이고 격렬한 정치적 도전으로 만들었다. 가장 주목할 만한 도전은 대의제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인민주권의 현실적 구현, 다시 말해 정치공동체의 크기와 구성원 수의 확대라는 이유로 많은 나라에서 채택된 대의민주주의가 원래 의도나 명분과는 달리 엘리트주의로의 전환이라는 거센 비판을 받았다. 엘리트 중심의 대의제에 대한 비판과 회의는 두 가지 방향으로 대응양상을 보여주었다. 하나는 잘못된 대의제의 수정을 위한 제도권 정치로서 직접적인 편입이며, 다른 하나는 대의정치가 아닌 자치공동체의 형성이다. 


신사회운동은 이전 사회운동과 다른 성격의 운동임을 표방하고 붙인 이름이다. 신사회운동은 근대성의 위기에 대한 인식과 개인의 정체성을 살리는 삶의 지향이라는 점에서 68운동의 연장선에 있다. 이는 신사회운동이 1960년대 유럽의 학생운동과 미국의 반전운동의 힘을 받아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기존의 사회운동이 노동운동, 계급운동, 정당운동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이들 운동의 목표는 권력 장악과 권력 구조로 진입하는 것이었다. 이에 반해, 신사회운동은 근대적 기획을 비판하고 근대적 사로 내에서는 주목받지 않던 새로운 주체와 관심을 대상으로 하여 근대적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정체성의 확보에 중점을 두었다. 즉 국가 중심의 근대적 기획이 결과한 인간의 자유와 자율에 대한 억제를 벗어나, 국가와 인간 중심주의에서 자연, 환경과 함께하는 개인의 삶을 만들고자 하였다. 신사회운동이 보여준 이와 같은 관심의 다양성은 단지 관심의 확장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신사회운동은 새롭게 확장된 관심을 실현시킬 수 있기 위해서는 국가와 같은 중앙집권적·관료적 기제보다는 개인적 삶과 개체성을 구현하는 미시적 수준의 공동체에 관심을 가졌다. 다시 말해 계급, 종교, 집단적 정체성을 뛰어넘는 대신 이들을 서로 묶어내는 새로운 화두, 곧 환경, 여성, 평화를 중심으로 자신들의 공동체를 만들고자 했다. 나아가 이러한 문제에 관심을 보이는 행위자와 단체 간의 네트워크도 형성하고자 했다. 이처럼 신사회운동은 양적·물질적 성장보다는 삶의 질과 방식, 자율성, 자아실현의 중요성을 인식하며 이에 근거한 삶의 터전을 마련하는 데 주목하기 시작했다. 신사회운동은 이를 두 가지의 방법으로 실현하고자 하였다. 하나는 새로운 정치세력화의 실현이며, 다른 하나는 기존의 정치질서 체계를 거부한 탈정치의 자유공동체이다. 양자 모두 기존 정치체제에 대한 불신과 회의로 인해 나타났지만 추구한 대안정치의 모습은 서로 다르다. 


3. 제그 : 자유로의 긴 여정 | 115 

4. 맥힌레스 대안기술공동체 : 지속가능한 삶과 기술 | 120 

5. 결론 | 125 

제5장 오로빌의 대안경제 | 김상준 

1. 서론 | 129 

2. 돈이 필요 없는 사회 | 132 

3. 오로빌 대안경제의 논리 | 136 

시장경제의 관계는 자신의 필요의 충족을 위해 이루어지지만, 대안경제의 관계는 타자의 필요의 충족을 위해 성립된다. 


4.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 | 145 

5. 결론 | 154 

제6장 친환경 순환농업과 무소유의 삶 : 야마기시즘(야마기시회) 실현지 | 김운호 

1. 서론 | 157 

2. 야마기시즘에 대한 이해 | 163 

야마기시회가 지향하는 방향은 ① 물리, 화학, 과학, 심리, 철학, 교육, 종교사, 문학능력, 예술 산업, 사회와 교류, 정치 등에 관여하고 있는 학자, 실천가에게 각자의 위치에서 실천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하고, ② 학문과 실험을 기초로 공기와 물 등을 이용하여 모든 물자를 풍부하게 생산하며, ③ 물자를 풍성하게 함으로써 물건을 쟁탈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고, ④ 학문과 실험을 기초로 하여 삶의 질을 개선하고, 질병을 없애며, 건강하고 우수한 자손을 낳고, ⑤ 자기보다 오래 살 공동체에서 함께 하는 자손의 행복과 번영이라는 목표를 바탕으로 세계 인류 사이에 협력과 동료애의 아름다운 마음을 조성하며, ⑥ 물심양면 공히 타인을 침해할 필요가 없는 협력 사회를 지향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3. 야마기시즘의 현장 : 생활실현지 방문 | 173 

4. 결론 | 186 

제7장 탈근대 시대의 대안공동체 : 트윈 오크스와 에코빌리지 | 송재룡 

1. 서론 | 191 

2. 탈근대에서의 공동체적 삶 : 딱딱한(solid) 삶에서 유동적(liquid) 삶으로 | 197 

3. 트윈 오크스 공동체 : 40년의 세월 속에 부드러워진 ‘월든’의 꿈 | 205 

4. 에코빌리지 공동체 : ‘대안적 삶’은 우리와 멀지 않다 | 214 

5. 결론 | 222 

제8장 결론 : 스스로의 행복을 찾아서 | 하승우 

1. 닫힌 공동체에서 열린 공동체로 : 공개와 순환 | 226 

공동체의 경계를 완전히 없애는 게 아니라 유동적으로 만드는 것이 대안공동체의 과제라고 할 수 있다. 대안이면서도 그 대안성을 폐쇄된 경계로 제한하지 않고 그 가치가 기성사회 속에서도 순환할 수 있도록 공개하는 것, 그것이 공동체의 중요한 과제이고 그것을 통해 공동체 내부의 행복만이 아니라 공동체 외부로도 그 행복의 가치를 전파할 수 있다. 


2. 자족성에서 보완성으로 | 230 

3. 순수성에서 관계로 | 233 

참고문헌 | 236 

찾아보기 | 242 

필자 약력 | 2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