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경제학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인디고 연구소 기획, 궁리, 2012, (140902).

바람과 술 2014. 9. 2. 22:51

공동선 총서를 기획하며 

서문


자본가의 착취 방식이 공적 영역(재산)을 사유화함으로써 그 지대를 물리는 방식으로 변화하고 있다는것. 자본가들의 이윤을 남기는 방식이 지적 재산권을 경유함으로써 보다 세련되고 뻔뻔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그리하여 오늘날 자본가들의 지배 체제야말로 민주주의를 거스르고 있으며 오히려 여론 독점과 이윤 독식이라는 경제적 독재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지젝은 오늘날 가장 가난한 사람들은 일을 하는 계층이 아니라 실업자나 배제된 자라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노동자계급이 곧 프롤레타리아 계급이라는 전통적 좌파의 고정관념을 파괴하기도 한다.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모든 영역에서 발생하는 배제된 자들끼리 '프롤레타리아적 입장'으로 포괄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 개념을 재전유하고 있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적 입장은 분노 자본이 자유롭게 운집하고 폭발하는 저항의 거점이 됨으로써 혁명의 새로운 주체들이 탄생하는 열린 공간이 된다. 지젝은 공동선을 '공동'과 '선'으로 분리해서 접근한다. '공동'은 보편성의 문제를 함축하는데, 보편성이야말로 배제된 자와 포함된 자를 가르는 장벽을 허물 수 있는 진정한 해방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선과 악을 초월한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보편성의 세계가 아니라, '선'의 규준을 투쟁으로써 쟁취하는 '구체적 보편성'의 세계야말로 좌파에게 주어진 또 다른 실천적 과제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지젝은 '선'이란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며, 자연보다 앞서서 존재하는 공동선이란 원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따라서 '선'은 점유, 혹은투쟁과 쟁취의 대상이 된다. 지젝의 어법을 빌려 말하자면, 급진적 좌파는 이 세계에 배제된 자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윤리적 결단을 이미 내린 상태이다. 그러므로 이것이야말로 좌파의 '선', 즉 '공동선'이다. 이는 좌파의 궁극적 욕망이기도 하다.  

1부 자유를 향한 공동투쟁 : 슬라보예 지젝 인터뷰 

1장 | 공동선과 새로운 물음 


공동선을 향하여 

정치는 윤리에 우선합니다. 오히려 더욱 급진적인 의미에서 우리가 '선(좋음)'이라고 정의 내리는 것은 단순히 우리가 그것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책임을 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조화를 이루려는 강박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대로 저속한 조작이나 부패, 권력 싸움 등을 의미하는 정치가 아니라, 지구에 대한 근본적인 결정을 공동으로 내리는 것과 그에 대해 완전한 책임을 지는 삶으로서의 정치 말입니다. 그렇기에 공동선을 발견한다고 표현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저는 두 개의 극단이 있고, 그 둘의 균형을 맞추면 된다는 식의 접근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저에게 있어 진정한 혁명이란, 균형을 맞출 때 그 기준 자체를 바꾸는 것을 뜻합니다. 


윤리의 정치화 

저는 자연적 질서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지점에서 저는 매우 근대적입니다. 자연적 질서란 재앙과도 같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제가 윤리의 정치화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단순히 '선'을 향한 의무를 다하는 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선'이 무엇인지에 대해 답을 해야 하는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부디 당신이 흥미로운 시절에 살기를!” 

우리가 공동선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새롭게 변화된 시대에 맞는 공동선에 대한 정의를 먼저 정립해야 합니다. 


문제의 또 다른 이름, 공산주의 

몇몇 좌파들은 제가 20세기 공산주의야말로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윤리-정치적 대실패라고 말하는 것을 싫어하지만, 이보다 더 부드러운 표현은 찾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어떤 측면은 충분한 성취였지만, 전 지구적 관점에서 볼 때 이는 대실패였습니다. 문제는 공산주의가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이고, 그 어느 때보다 많은 문제들이 다시금 제기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에게 공산주의는 해답이 아입니다. 즉, 우리가 직면한 문제가 있다고 할 때, 그것은 우리 모두의 '공동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레닌주의적 방식이 아닌, 제가 말하고자 하는 공산주의입니다. 문제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것이죠. 


누가 실패한 혁명을 두려워하는가? 

새로운 세속적 좌파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혁명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가능한 다른 세계


새로운 형태의 독재는 예전처럼 규율과 질서가 지배하는 모습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탈정치화된 질서를 갖습니다.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스캔들의 공적 사용 

사람들은 때론 이를 두고 미디어가 더 이상 개인의 사생활을 보호해주지 않고 모든 것을 까발린다고 주장하곤 하지만 저는 오히려 반대로 생각합니다. 우리는 사생활을 잃게 된 것이 아니라, 공적인 삶을 잃어버렸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완벽한 인간으로서의 리더를 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자신들과 같이 부족함이 있는 리더를 원하죠. 


전 지구적 영토의 탄생 

북한의 몰락 

한 녀학생의 일기 

좌파의 은밀한 저항


비밀경찰의 가장 큰 실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에게는 비밀이 없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겁니다. 비밀 따위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우리에게 숨겨진 계획이나 음모가 있는지 찾아내려 하고, 그러면서 에너지를 낭비하고 앉아 있는 겁니다. 모든 것이 다 공개되어 있는데 왜 이러한 짓을 하는 겁니까? 이것이 좌파의 은밀한 저항 방법이 되어야 합니다. 즉, 어떤 것을 숨기는 방식이 아니라 그 어떤 것도 숨기지 않음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마치 숨겨진 의도가 있는 것처럼 혼란을 주는 방식 말입니다.  

2장 | 공동선과 새로운 혁명 

질문을 발명하라 

프롤레타리아--되기 

마르크스에게 있어 자본주의적 착취란 법적 자유와 평등이라는 조건에서 이루어져야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은 곧 우리 모두는 공식적이고 법적으로 동등한 권리를 갖고 있고 충분히 자유롭지만, 사실상 만약 돈이 없다면, 당신은 스스로를 시장에 내다팔아야 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이제 더 이상 전 지구적 평등의 문제를 결코 견뎌내지 못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어떤 영국의 한 마르크스 분석가는 아주 정확하고 단순한 지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가 지적하길, 마르크스의 시대에는 프롤레타리아가 아주 진중한 성격들로 특징지어졌습니다. 그들은 사회의 가장 가난한 계층이자,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사람들로서 부를 창출하는 계층 등으로 규정되었죠. 오늘날에도 그들은 이러한 특성을 모두 가지고 있지만, 더 이상 하나의 주체로 수렴되지는 않습니다. 오늘날 가장 가난한 사람들은 일을 하는 계층이 아닙니다. 실업자나 배제된 자 등이 가장 가난한 자들입니다. 


포함된 자와 배제된 자 

마르크스에게 있어 여전히 유효한 것이 단 하나 있다면, 자본주의 사회에는 두 세계 사이의 극단적인 간극이 있다는 지적입니다. 한쪽은 사람들이 일을 하고 소비를 하는 현실, 또 다른 한쪽은 끝없이 순환하는 자본이라는 가상이 바로 그 두 세계입니다. 


민주주의 길들이기 

혁명의 최소 조건 

카페 레볼루시옹 

공적인 질서가 와해되는 것은 결코 좋은 것이 아닙니다. 제가 보기에 이것이 바로 우리가 혁명을 원할 때, 법과 사회적 질서를 재건하는 정치적 그룹이 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사람들이 가장 기본적인 안전을 원하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라!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에 있어 위대한 승리는 도덕적 다수의 위치를 차지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진짜 사랑의 공포 

“오, 이 불쌍한 영웅들!” 

말하지 말아야 하는 것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 수 없다 

3장 | 공동선과 새로운 기획 

위험한 희망 

정치, 보편성, 기적 

슬럼의 정치화 

포퓰리즘의 비용 

폭력은 이미-여기에 늘 있다 

그저 빤히 쳐다볼 뿐…… 

간디의 폭력


인간의 존엄성을 대상으로 하는 혁명의 방식은 상대가 최소한의 윤리를 가지고 있을 때에만 성공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좌파의 기획 

진정한 좌파의 기획은 언제나 사람과 기능을 구분합니다. 대의나 소명 의식하에, 함께 같은 길을 가고자 하는 이가 있다면 '우리'에 속하는 겁니다. 그리고는 "함께 가자"고 외치는 방식. 이것이 진정한 좌파의 기획이 되어야 합니다. 


구체적 보편성 

자유를 향한 공동 투쟁 

인간--됨 

불/가능의 경계 흐리기 

인터뷰 후기 

"모든 것을 잃게 되었을 때, 내가 그대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떠올려봐요(Where there is nothing, read I love you)."을 읽어주고, 이 문장이 프랑스 철학자 시몬 베유를 표현하는 것이라 말해주었다.  


기고문 | 상황은 파국적이지만, 심각하지는 않다--슬라보예 지젝

 
슬라보예 지젝 전화 인터뷰


첫째, 여러 움직임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기는 하였지만, 많은 대중적 운동들은 여전히 단일한 사안을목적으로 삼은 운동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움직임의 기본 전제는 자본주의 시스템 내에 근본적인 구조적 문제가 있다고 것입니다. 자본주의 시스템의 구조 자체에 결함이 있다는 지적이지요. 이러한 통찰은 이론적인 이유에서도 아주 결정적인 변화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둘째로, 아마 이것이 더 중요한 지점일 텐데요.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민주주의의 제도적 시스템으로는 [문제를 해결하기에] 불충분하다는 점입니다. 현재 민주주의는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못합니다. 이러한 문제들을 제어하기에는 그 힘이 턱없이 부족한 것이 사살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자유를 위한 투쟁이나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운동과 같이 위대한 사건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 부정적인 부분을 간과해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 지금의 시점에서 우리에게 시위나 행동보다 중요한 것은 문제를 제대로 사유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를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네트워크를 조직하는 것입니다. 열심히 하는 노력에 끝이란 없기 때문입니다.  

2부 혁명으로 가는 길 : 윤리에서 정치로, 이론에서 실천으로 

정치 주체의 탄생과 혁명의 도래


오늘날 우리가 가진 문제 중 하나는 사람들이 늘 보고 경험하는 세계 바깥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관심을 가지는 열정보다 넓은세계에 대한 배움을 통해 환희를 느끼는 능력을 잃어버렸다는 겁니다. 물론 이는 그들을 도덕적으로 훈계하려는 의도는 아닙니다. 다만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이데올로기적 분리 현상에 대한 지적을 하고 싶습니다. 사람들은 각자 자신이 가진 것들에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고, 나름의 공동선을 가지고 있지요. 그런데 문제는 공동선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것을 놓치고 있다는 겁니다. 첫째, 이 보편성을 마치 다양한 종류의 것들을 마구 잡아넣을 수 있는 하나의 주머니와 같은 전체성으로 파악하는 것입니다. 이는 물론 잘못된 규정이지요. 공통선의 기반이 되는 최소 공통분모를 찾고자 하는 겁니다. 둘째, 헤겔의 용어이기도 한 구체적 보편성이 있습니다. 보편성은 언제나 한 사회 내부에 존재하는 특정한 형태의 적대와 관련이 있습니다. 보편성은 단순히 중립적인 것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보편성은 사회 내의 결정적인 분열과 적대에 더 깊이 관여하는 것을 뜻합니다. 물론 앞서 언급한 적대란 필연적으로 누군가를 배제하는 논리를 선험적으로 자체 내에 담고 있기 때문에, 전체성을 담보하는 것은 특히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치와 윤리, 이 두가지를 서로 대립하는 것으로 다루고 싶지도 않고, 또 정치의 결과물은 대개 나쁜 것이기 때문에 이제 그 대안으로서 윤리의 영역을 더 많이 탐구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특히 공동선의 맥락 속에서 이야기하자면, 정치와 윤리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상호간에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말하자면 공동선은 정치적인 실천입니다. 실제로 실천은 이 두 영역이 어떻게 관계할 수 있는지를 밝힐 수 있는 중요한 단서입니다. 실천은 근본적으로 구체적인 것이며, 이 세계 내에서의 존재 방식과도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신념을 갖고 지속적인 실천을 계속 확장해 나가는 것은 명실공히 정치적인 행동이 될 수 있는 겁니다. 실천을 정치적인 것으로 볼 수 있는 또 다른 이유는, 실천을 하는 사람은 그로 인해 발생하는 결과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결과를 통제할 수는 없지요. 하지만 이렇게 결과에 책임을 지는 방식의 정치적인 의지를 바탕으로 사회를 조직하고자 할 때, 실천적 참여는 가능해지며 최소한 그로 인한 결과물들은 풍성해질 것입니다. 나아가 이러한 실천은 단순히 한 개인의 행위로 그저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자산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윤리로부터 정치로의 전환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집단'이라는 개념입니다. '집단'이라는 개념은 윤리에서 다루어지는 개념은 아니지요. 윤리란 대개 선험적인 것이나 개인적이고 고립된 주체에 국한된 것으로 인식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윤리의 영역에서는 집단으로 향하는 통로를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의 실천이 진정한 실천으로 거듭날 수 있는 것도 이와 같은 집단적 실천의 기점에서 비롯될 수 있습니다. 단 여기에서의 실천이란, 실천을 통해 우리 스스로 서 있는 지평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방식을 취하는 것을 뜻합니다. 당연하게 여겨왔던 근본 법칙을 문제 삼는다는 것이죠.


윤리에 대한 논의에 있어 '실재'라는 개념은 저에게 아주 핵심적인 것입니다. 실재란 현실 자체가 갖는 적대의 모순이 드러나는 지점입니다. 오늘날의 담론 속에서 윤리가 지나치게 오용되거나 남용되고 있다는 지적을 하는 이유는, 현대의 윤리는 너무 많은 종류의 딜레마를 만들어내고, 또 두려움을 조장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누구도 당신이 숙고한 결정이 옳았다고 보장해줄 수는 없습니다. 당신이 어떤 선택을 하면 그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합니다. 


문제는 이 '죄책감'이라는 것을 '도덕적 양심'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윤리적 주체의 형성은 단적으로 죄책감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윤리적 주체가 되어가는 점진적 과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하나의 혁명적인 새로운 창조와도 같은 것입니다. 


칸트에게 있어 급진적인 '악'의 형태는 말하자면 포기하는 행위, 다시 말해 자신의 자연적 본성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보편을 향한 해방|알렌카 주판치치 인터뷰 

지워진 사람들 

스튜디오 포퍼 

폴리투스 

혁명이 태어나는 새로운 분할선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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