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도래하는 공동체], 조르조 아감벤, 이경진, 꾸리에, 2014, (141117).

바람과 술 2014. 11. 17. 13:08

임의적 008

도래하는 존재는 임의적 존재이다. 임의적 존재는 욕망과 근원적으로 관계하고 있다. 그렇게 임의적 특이성은 더 이상 어떤 것의 앎이나 이런저런 특성의 앎, 이런저런 본질의 앎이 아니라 앎의 가능성의 앎이 된다. 


고성소로부터 012

예 018

언어적 존재란 바로 자기 자신을 포함하면서 동시에 포함하지 않는 집합이며, 자기 자신을 포함하지 않는 모든 집합의 집합이 바로 언어이다. 


자리 잡음 024


윤리의 의미는 선이 선한 상태도 아니요, 모든 나쁜 사태나 가능성의 곁 혹은 위에 존재할 가능성이지도 않으며 그럴 수도 없다는 점, 또한 진정성과 참이 비진정성과 거짓에 (아무리 정반대라 하더라도) 완전히 평행하는 실제 술어가 아니라는 점을 이해할 시에마 분명해질 수 있다. 윤리는 선이 악의 포착에 다름 아니라는 점, 진정성과 고유성이 비진정성과 비고유성 외에 어떤 다른 내용도 갖지 않는다는 점이 밝혀질 시에만 시작된다. 


선의 정복은 추방했던 악의 성장을 전제한다. 천국의 성벽이 단단해질수록 지옥의 심연은 까마득해졌다. 


신이나 선, 장소는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개체들의 '자리 잡음'이자 그것들의 더없이 내밀한 외부성이다.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 무언가가 나타날 수 있고 얼굴을 가질 수 있다는 것, 모든 것의 규정이자 한계로서 외부성과 비-잠재성이 있다는 것. 이것이 곧 선이다. 모든 지상의 실존이 초월되고 노정되는 이유는 그것들이 이 지상에서 수선불가능/만회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은 이 사물들과 관련해서 어딘가 다른 곳에 있지 않다. 선은 단지 그 사물들이 자기 자신에게 고유한 자리-잡음을 포착하는 그 지점에, 그것들의 저 자신의 비-초월적 질료에 닿는 그 지점에 있다. 이런 의미에서 - 오직 이런 의미에서만 - 선은 악의 자기 자신의 포착으로, 구원은 자리의 자기 자신으로서 도래로 정의되어야 한다. 


개체화의 원리 030


여기에서 결정적인 것은 비본질적인 공통성의 이념, 결코 본질과 관련되지 않는 연대의 이념이다. 연장성의 속성에서 자리-잡음, 특이성들의 소통은 특이성들을 본질 속에서 통합하지 않고 실존 속에서 분산시킨다. 


임의적인 것은 특이성에 대한 공통 본성의 무차별성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공통적인 것과 고유한 것, 종과 류, 본질적인 것과 우연적인 것 간의 무차별성에 의해서 구성된다. 어떤 사물이 임의적이라 함은 그것이 자신의 모든 속성을 전부 갖지만 그 속성들 중 어느 것도 차이를 구성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특이한 실존의 개체화는 점점의 사실이 아니라 생장과 감퇴, 전유와 박탈의 연속적 단계 변화에 따라 방향이 달라지는 실체의 발생선이다. 여기에서 선의 형상이 나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아죠 038


루이 마시뇽에 따르면 타인을 대신한다는 것은 타인에게 결여된 것을 채워주거나 그의 잘못을 교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 타인의 존재 그대로 타인에게 망명하는 것, 그리하여 그의 영혼과 그의 자리-잡음 속에서 기독교적 환대를 제공하는 것이다. 타인을 대신한다는 것은 제자리와 타인의 자리를 더 이상 구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모든 개별적 존재의 '자리 잡음'은 항상 이미 공통적인 것이며, 나눌 수 업고 철회할 수 없는 환대에 열리는 빈 공간이다. 


습성 044


서구 존재론을 지배해온 구분법으로 말해보자면 본질도 아니요 실존도 아니며 오히려 생성 습성이다. 그것은 이런저런 양태 속에 존재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 자신의 존재 양태 자체인 존재이다. 따라서 그것은 특이하지만 무차별적이지는 않으면서도 다자적이며 모두에 해당된다. 이러한 생성 양태의 이념을 통해서만, 이러한 존재의 본원적인 매너리즘을 통해서만 존재론에서 윤리학으로 넘어가는 공통된 길을 찾을 수 있다. 


생성 습성은 임의적 특이성의 자리이자 그것의 개체화 원리이기도 하다. 이것은 자기 자신의 고유한 습성인 존재에게 있어 존재를 본질로 규정하고 식별하는 속성이라기보다는 비-속성이다. 존재가 범례가 되는 것은 이러한 비-속성을 자신의 고유한 존재로 간주하고 전유할 때이다. 하지만 이러한 존재도 그 다신에게 속하지 않으며 전적으로 공통적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고유한 존재로서 노정하는 비-속성, 즉 우리가 사용하는 습성은 우리 자신을 산출해낸다. 그것은 우리의 제2의, 더 행복한 본성이다. 


악마적 050


바틀비 054

사유는 오로지 이러한 사유하지 않을 잠재성 덕분에 자기 자신으로 (자신의 순수한 잠재성에) 되돌아갈 수 있고, 자신의 정점, 즉 사유의 사유일 수 있다. 


만회불가능한 060

만회불가능하다는 것은 사물들이 구제할 길 없이 자신의 이렇게 존재함에 맡겨져 있다는 것이며 바로 이렇게밖에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만회불가능하다는 것은 자구 그대로는 사물들에게 아무런 보호처도 존재하지 않느다는 의미이며 사물들이 제 이렇게 존재함 속에서 완전히 노정되어 있고 버려져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는 서구 사상의 두 교차축인 필연성과 우연성이 심판 후의 세상에서 사라져 버린다는 것을 함의한다. 필연성의 법령을 승인하는 존재하지 않을 수 없음과 변동하는 우연성을 규정하는 존재하지 않을 수 있음 사이에서 유한한 세계는 결코 어떤 자유도 정초하지 않는 제2의 잠재성에 우연성을 들여놓는다. 세계는 존재하지 아니 아니할 수 있다. 세계는 만회불가능함을 행할 수 있다. 


윤리 064

어떤 윤리 담론이든 간에 그 출발점은 인간이 정립하거나 실현해야 할 본질이나 역사적 혹은 종교적 사명, 생물학적 운명 따위는 없다는 사실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윤리와 같은 것이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가 된다. 왜냐하면 인간이 이런저런 실체이거나 실체이어야 한다면, 또 이런저런 운명이거나 운명이어야 한다면 그 어떤 윤리적 경험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저 이루어야 할 과업이 있을 뿐이다. 실상은 인간이고 인간이어야 하는 무언가가 존재하는데 그 무언가는 본질도 아니며, 본래적 의미에서 어떤 사물도 아니다. 그것은 가능성 또는 잠재성으로서의 자기 현존이라는 단순한 사실이다. 하지만 바로 이 점 때문에 모든 것은 복잡해지며 바로 이 점 때문에 윤리는 작동하게 된다. 


딤(DIM) 스타킹 068

후광 076

미세하게 위치가 달라지는 것은 사물들의 상태가 아니라 사물들의 의미와 한계이다. 그것은 사물들 안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사물들의 주변부에서, 모든 사물과 자기 자신 사이에 놓인 아죠(agio)에서 일어난다/자리를 잡는다.


후광은 바로 이렇게 완전함에 덧붙여지는 보충이다. 그것은 마치 완전한 것의 미세한 떨림, 완전한 것의 가장자리에 은은히 비치는 빛과 같은 것이다.


가명 084

모든 찬양이 언어에 대한 찬양이듯이 모든 통곡은 언제나 언어에 대한 통곡이다.


계급 없이 088

만일 우리가 인류의 운명을 다시 한 번 계급의 개념으로 사유하고자 한다며 오늘날에는 더 이상 사회 계급이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모든 사회 계급이 용해되어 있는 단일한 행성적인 소시민 계급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 소시민 계급은 이 세계의 상속자이며 인류가 허무주의를 이기고 살아남은 형태이다. 


주지해야 할 사실은 소시민적 실존의 무의미함이 모든 광고도 그 앞에서는 실패하고 마는 궁극적인 무이미함, 즉 죽음과 충돌한다는 것이다.


외부 094

임의적인 것은 순수한 특이성의 형상이다. 임의적 특이성은 어떤 정체성을 지닌 것도 아니며 개념적으로도 규정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임의적 특이성이 단순히 무규정 상태라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의 어떤 이념, 즉 자신의 가능성들의 총체와 맺는 관계를 통해서만 규정된다. 


고로 임의적인 것이 특이성에 추가로 부가하는 것은 텅 빔, 어떤 한계일 뿐이다. 임의적인 것은 빈 공간에 부가된 특이성이며 개념적으로는 완전히 규정될 수는 없지만 유한한 특이성이다. 하지만 이런 빈 공간에 부가된 특이성은 순수한 외부성에 지나지 않으며, 한갓 노정될 뿐이다. 임의적인 것은 이런 점에서 외부의 발생이다. 외부는 규정된 공간 너머에 있는 어떤 공간이 아니라, 통로, 즉 규정된 공간으로 하여금 접근을 가능하게 하는 외부성이자, 한마디로 말하면 그 공간의 얼굴, 그것의 형상이다. 이런 의미에서 한계는 경계와 다른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한계는 경계의 경험 자체, 즉 어떤 외부의 내부에 있는 경험이다. 


동명이의 098

프레게가 예감했고 오늘날 우리가 훨씬 분명히 보게 되었듯이 집합론의 역설은 실상은 칸트가 이미 1772년 2월 21일 마르쿠스 헤르츠에게 보낸 서한에서 정식화한 문제와 같은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표상이 대상을 무슨 근거로 지시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지향대상이 되지 않고서 지향될 수 없는 이러한 지향성의 아포리아는 중세 논리학자들에게 "인지적 존재"의 역설로 잘 알려져 있었다. 


유형 간의 위계(러셀이 젊은 비트겐슈타인에게 제안하여 그를 상당 기간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것처럼)가 아니라 오직 이념의 이론만이 사유를 언어적 존재의 아포리아에서 해방시킬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동명동의어들은 동일한 이름과 동일한 정의를 가진 개체들이다. 이는 다시 말해서 그것들이 하나의 일관된 집합의 원소들인 한에서, 즉 그것들이 어떤 공통된 개념에 참여함으로 하나의 집합에 속하는 한에서 그것들은 현상들이다. 하지만 서로 동명동의관계에 있는 동일한 현상들은 이념에 대해서는 동명이의의 관계에 있게 된다. 따라서 각각의 말들은 말이란 개념에 대해ㅓ는 동명동의어들이지만 말의 이념에 대해서는 동명이의어들이다. 이것은 바로 러셀의 역설에서 동일한 대상이 한 집합에 속하면서 속하지 않는 것과 같다. 동명동의어를 동명이의적으로 만드는 것은 대상도 개념도 아니라 자신이 이름을 가졌다는 것, 자신의 고유한 귀속 자체, 또는 자신의 언어 속 존재다. 사물의 이념은 고로 사물 그 자체이다. 이러한 무명의 동명이의는 이념이다.


하지만 바로 이런 이유에서 이념은 동명이의어를 임의적인 것으로 구성한다. 특이성은 개념에(만)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이념에(도) 관계하는 한에서 임의적이다. 이로써 무명으로 남는 것은 명명된 존재, 이름 그 자체이다. 언어 속 존재는 언어의 귄위에서 공제된다. 아직도 이해하려면 갈 길이 먼 플라톤의 동어반복에 따르면 사물의 이데아는 사물 그 자체이고 이름은 그것이 사물을 명명하는 한, 사물의 이름에 의해 명명되는 한, 사물에 다름 아니다. 


셰키나 108


스펙터클이 단순히 이미지들의 영역이나 우리가 오늘날 미디어라 부르는 것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이미지들로 매개된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이며 인간적인 사회성의 박탈이자 소외 그 자체이다. 아니 더 간단히 정식화해보자면 스펙터클은, 그 자체가 이미지가 될 정도로 축적된 자본이다. 분명한 것은 스펙터클이 곧 언어이며, 바로 소통가능성 자체 혹은 인간의 언어적 존재 그 자체라는 점이다. 이 말인즉슨 마르크스의 분석을, 자본주의(혹은 뭐라 부르든 간에 오늘날 세계사를 지배하는 이 과정)가 비단 생산활동의 박탈만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언어 자체의 소외, 바로 인간의 언어적이고 소통적인 본성의 소외, 헤라클레이토스의 단편에서 공통적인 것과 동일시되었던 저 로고스의 소외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로 보완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 공통적인 것의 박탈의 극단적 형태가 바로 스펙터클이며, 이것이 곧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정치 형태이다. 하지만 바로 이 점이 스펙터클이 자기 자신에 대항할 수 있는 어떤 긍정적인 가능성 같은 것을 보유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톈안먼 116


도래하는 정치가 새로운 이유는 그것이 더 이상 국가의 정복이나 통제를 쟁취하는 투쟁이 아니라 국가와 비국가(인류) 사이의 투쟁이며 임의적 특이성과 국가 조직 사이의 극복될 수 없는 괴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알랭 바디우가 보여주었듯 국가는 자신이 곧 그것의 표현인 사회적 결속을 기반으로 세워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금지하는 것인 해체, 해소를 기반으로 세워진 것이다. 따라서 국가에게 중요한 것은 결코 특이성 그 자체가 아니라 오직 그 특이성을 어떤 정체성 안에, 임의적 정체성(하지만 어떤 정체성으로 확정되지 않는 임의성 그 자체의 가능성은 국가가 대응할 수 없는 위협이 된다) 안에 포함시키는 문제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유대인 학살을 두고 학살자들이나 그들의 판사들 모두 그것을 살인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판사들은 도리어 유대인 학살을 인류에 대한 범죄라 평가했다는 사실, 또 승전국들은 이러한 정체성의 결여를 어떤 국가 정체성을 승인함으로써 보완하고자 했다는 사실, 그리고 이것은 또다시새로운 학살을 불러왔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한 것이다. 

단상 만회불가능한 것 122


만회불가능하다는 것은 사물들이 이런저런 방식으로, 존재하는 대로 그렇게 존재하며 어떤 구제의 손길을 빌리지 않고 자기의 존재 방식에 맡겨져 있다는 것이다. 사물들의 상태는 그것들이 어떻든 간에, 슬프든, 행복하든, 끔찍하든, 복되든 간에 만회불가능하다. 당신이 어떻게 있는지, 세계가 어떻게 있는지-이것이 바로 만회불가능한 것이다. 만회불가능한 것은 본질도 실존도 아니고 실체나 특성도 아니며 가능성도 필연성도 아니다. 그것은 기실 존재의 양태성이 아니라 언제나 이미 양태성 속에 주어진 존재, 즉 자신의 양태성들로 존재하는 존재이다. 그것은 이렇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이렇게'로 존재한다.


실존한다는 것은 어떤 특성을 띤다는 것, '~대로' 존재함의 고통에 몸을 맡긴다는 (상호침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특성, 개별 사물의 이렇게 존재함은 그것의 고통이자 원천이며 그것의 한계다. 


구원은 세속적인 것이 신성해지고 상실한 것을 다시 찾는 사건이 아니다. 구원은 정반대로 상실한 것의 만회할 수 없는 사실이며 세속적인 것의 최종적인 세속화이다. 하지만 바로 이런 이유에서 그들은 그들의 종말에 도달한다-어떤 한계가 강림한다. 이런 상태가 만회불가능하다는 것, 이러한 이러함에 어떤 구원의 손길도 없으며 우리는 그 상태를 그러한 것으로 관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이것이 세계의 외부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구원의 가장 내밀한 특징은 우리가 구원받기를 더 이상 원하지 않는 순간이 되어야 우리는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바로 이 순간에 구원이 있다-하지만 우리를 위한 것은 아니다.)


당신이 세계의 만회불가능성을 인지하는 그 지점에서, 바로 그 지점에서 세계는 초월한다. 세계는 어떻게 있는가-이것은 세계 외부에 있다.  


2001년판 후기 어둠의 구원 148

옮긴이의 말 1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