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젝의 월가점령시위 연설 전문 : 스스로와 사랑에 빠지지 마라
2011년 4월 중반, 중국 정부는 대안적 현실이나 시간여행을 소재로 삼은 TV, 영화, 소설 등을 금지했다. 사람들이 여전히 대안을 꿈꾸기 때문에 금지해야 했다면 이는 중국에 좋은 징후다. 그러나 서구 사회의 우리는 금지가 필요 없다. 이미 지배체제가 우리가 꿈꿀 능력마저 억압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늘 보는 영화를 생각해보라. 세상의 종말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종말은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기억하라. 문제는 부패나 탐욕이 아니다. 체제 그 자체가 문제다. 그것은 사람들을 부패하게 만든다. 우리를 공산주의라고 한다면, 그 유일한 이유는 우리가 공동의 것을 염려하기 때문이다. 자연에서 공동의 것, 지적 재산에 의해 사유화된 공동의 것, 유전공학의 공동의 것. 이를 위해, 오직 이것만을 위해 우리는 싸워야 한다. 공산주의는 확실히 실패했지만 공동의 것에 대한 문제는 여전히 존재한다. 갈망하는 것을 진정으로 추구하길 두려워하지 마라.
감수의 글
1 와 남 니하단
오늘날의 공산주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이성의 공적인 사용'과 평등주의적 보편적 사유로, 생각하면서 시작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칸트에게 '세계시민사회'의 공적 공간이란 보편적 단독성의 역설, 즉 일종의 단락으로 특수성의 매개 없이 곧바로 보편성에 참여하는 단독적 주체의 역설을 가리킨다. 여기서 '사적'이란 공동적 연대에 반대되는 개인적 유대가 아니라, 한 사람의 특별히 동일시하는 공동적 제도적 질서를 말한다. 이에 반해, '공적'이란 이성의 행사의 초국가적인 보편성을 지칭한다. 요컨대, 자유롭게 생각한다고 해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는 것은 아니다. '이성의 공적 사용'을 통해 기존 질서의 약점과 불의를 목격하게 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통치자에게 개혁을 호소하는 것이다. 칸트의 이성의 공적 사용과 마르크스의 혁명적 계급의식 사이의 명백한 차이를 지적하기란 무척 쉽다. 전자는 중립적이고 비개입적이지만, 후자는 '편파적'이고 완전한 개입을 요구한다. 하지만 '프롤레타리아적 입장'은 이성의 공적 사용이 이성의 사적 사용이라는 '사생활'로 후퇴하지 않고도 그 자체로 실용적이고 효율적이 되는 입장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 입장이 적용되는 지점이 사회체의 '몫 없는 부분'. 즉 그 과잉이 곧바로 보편성을 구현하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반면,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당-국가의 도구로 전락시킨 스탈린의 행위는 정확히 이성의 공적 사용을 사적 사용으로 환원시킨 사례다. 오로지 '이성의 공적 사용'의 보편성과 참여적이고 주관적인 입장을 접목시킨 접근만이 우리가 처한 상황에 대한 '인식적 지도'를 제공할 수 있다.
2 지배에서 착취와 저항으로
현대 자본주의의 세 가지 틍징에 주목해야 한다. 첫째, 이윤 추구에서 지대(주로 사유화된 '공유 지식'과 천연자원에 기초한 두 가지 형태) 추구로 전환되는 장기적 추세다. 둘째, 더 오랜 기간 '착취'당하는 일이 오히려 특권으로 인식되면서 싱업의 구조적 역할이 한층 더 강화되는 현상이다. 그리고 마지막 특징은 장 클로드 밀네가 '봉급 부르주아'라고 부른 새로운 계급의 부상이다. 오늘날의 비물질 노동은 마르크스가 19세기 자본주의에서 대규모 산업생산이 지배적이라고 선언했던 바로 그 의미에서 '지배적'이다. 양적인 측면에서가 아니라 핵심적이고 상징적이며 구조적인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총체적으로 특정한 색채를 띠어가는 것이다. 여기서 출현하는 것이 '공동'이라는 방대하고 새로운 영역이다. 즉 공유된 지식, 각종 형태의 협력과 커뮤니케이션 등은 더 이상 사유재산의 형태로 담을 수 없다. 비물질 생산의 산물은 더 이상 물질적 대상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적(대안) 관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비물질 생산은 직접적으로 삶정치적이며, 사회적 삶의 생산이다.
오늘날 우리는 생태자본주의부터 기본소득자본주의까지 자본주의를 순치하려는 수많은 공세 속에서 살아간다. 이러한 시도의 배후에는 다음과 같은 추론이 존재한다. 자본주의가 현재로서는 부를 창출하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사실이 역사적으로 입증되었지만, 동시에 이대로 방치될 경우 자본주의의 재생산 과정에서 착취, 천연자원의 파괴, 집단 고통, 불의 전쟁 등이 수반된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목표는 이윤을 추구하는 재생산이라는 자본주의의 기본 틀을 유지하되, 글로벌 복지와 사회 정의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자본주의를 조정학고 규제해나가는 것이다. 또 시장에는 그 나름의 수요가 있음을 존중하고, 시장 메커니즘을 직접적으로 교란시키며 대재앙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여 자본주의라는 짐승이 제 기능을 다하도록 내버려두어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시도는, 실용주의적 현실주의와 정의를 고수하는 원칙주의를 결합시키려는 노력이 보통 그러하듯, 선의로 시작하여 조만간 두 가지 차원의 적대라는 실재에 직면하게 된다. 자본주의라는 짐승이 자애로운 사회적 규제로부터 도망치는 일이 거듭 반복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시점엔가 우리는 숙명적인 질문과 마주치게 될 것이다. 정말로 자본주의라는 짐슴과 함께 가는 것만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최선의 방법일까?
3 정치적 대표의 꿈 작업
포퓰리즘적 보나파르트식 대표의 역설적 구조가 형성된다. 즉 모든 계급 위에 군림하고, 모든 계급 사이를 오가며, 모든 계급의 비천한 잔여물에 직접적인 기반을 두면서도, 아울러 스스로 정치적 대표를 요구하는 집단적 행위주체가 될 수 없는 계급을 궁극적으로 대표해야 한다. 이 역설이 의미한느 바는 순수한 대표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라캉 식으로 표현하자면, 계급 적대는 그러한 전체 대표가 실질적으로 존재할 수 없게 만든다. 계급 적대는 결국 한 사회의 중립적인 '전체'란 없고, 모든 '전체'는 특정계급에 은밀하게 특권을 부여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만약 보충물 없이 '1+1' 상태로 두 계급만 존재했다면, '순수한' 계급 적대 대신 두 계급이 상호 보완하여 조화로운 전체를 이루는 계급 평화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렇게 계급투쟁의 '순수성'을 흐리거나 저치하는 요인이 바로 계급투쟁의 원동력이라는 데 역설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현실 세계에서 적대적인 두 계급만 존재하는 경우는 절대 없다고 주장하는 마르크스주의 비판자들은 핵심을 놓치고 있다. 바로 그렇게 적대적인 두 계급만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계급투쟁이 존속하는 것이다.
레닌은 '경제적 토대' 안에서 그 핵심요인인 국가의 역할을 간과했다. 모든 사회적 통제 기제로부터 자유로운 국가의 역할을 간과했다. 모든 사회적 통제 기제로부터 자유로운 독재 국가의 성장을 막니는 커녕 방치함으로서 국가에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할 공간을 열어주었다. 국가가 외제적인 사회적 계급은 물론 국가 그 자체까지 대표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에만 누가 국가 권력을 보유할 것인가의 문제로 넘어갈 수 있다.
대립관계가 사회적 총제의 핵심으로 작용하지 못한다고 해서 다른 차이들과 절합해야 한다는 의미만은 아니다. 그만큼 이 관계가 '추상적'이라는 의미고, 마르크스주의의 도박은 다른 모든 것을 중층결정하고 그 자체로 모든 분야의 '구체적 보편성'이 되는 하나의 적대(계급투쟁)를 상정하는 데 있다. 여기서 '중층결정'이란 용어는 정확히 우리 알튀세르의 의미로 쓰인다. 즉 계급투쟁이 다른 모든 투쟁의 궁극적인 지시대상이자 의미의 지평이라는 뜻이 아니라, 다른 적대를 '등가 연쇄'로 분절할 수 있는 매우 '모순적인' 수많은 방식을 설명해주는 구조적 원리라는 뜻이다. 역설적인 것은 포퓰리즘적 근본주의는 이 적대의 논리를 계속 고수하는 반면, 자유주의적 좌파는 차이를 인정하고 적대를 차이의 공존으로 바꾸려는 논리에 따른다는 것이다.
4 사악한 민족주의의 귀환
단순히 타인을 존중하지 말고, 그들에게 공동의 투쟁을 제안하자. 오늘날 우리를 가장 크게 압박하는 문제는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문제이니 말이다.
5 탈이데올로기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극단이 있다. 한쪽은 즐거움을 연장시키고 자신에게 해가 될 일을 피하기 위해 쾌락을 신중히 계산하는 계몽된 쾌락주의자고, 다른 한쪽은 치명적으로 과도한 향락 속에서 존재의 절정에 도달하려는 향략주의자다.
6 아랍의 겨울, 봄, 여름, 가을
7 월가점령시위, 또는 새로운 시작을 부르는 폭력적 침묵
마르크스는 자유의 문제를 고유의 정치적 영역에서 주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국가에서 자유선거가 실시되는가? 사업부가 독립적인가?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는가? 인권이 존중되는가? 등). 실제 자유의 핵심은 오히려 시장에서 가족에 이르는 사회적 관계들으 그물망에 있고, 이 영역을 진정으로 개선하는 데 필요한 것은 정치적 개혁이 아니라 '비정치적'인 사회적 생산관계의 변혁이다. 우리의 반자본주의적 성향이 아무라 급진적이라도 이 점을 모색하지 못하면 늘 민주주의 기제를 적용하는 틀 안에서 해법을 모섹할 것이다. 물론 민주주의 기제도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지만, 그 자체가 자본주의 재생산의 원활한 가동을 보장하는 '부르주아' 국가 장치의 일부임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의 적은 제국이나 자본이 아니라 민주주의라고 불린다."라는 알랭 바디우의 언뜻 의아하게 들리는 주장은 정곡을 찌른다. 오늘날 자본주의적 관계의 모든 급진적 변화를 가로막는 주범은 민주주의적 절차 내에서만 모든 변화가 가능하다고 믿는 '민주주의적 환상'인 것이다. 월가점령시위의 수많은 (종종 혼란스런) 발언들 기저에는 두 가지 기본적 통찰이 깔려 있다. 첫째, 현재 대중의 불만은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에 대한 것이다. 문제는 시스템 자체이지 그 특정한 부패 사례가 아니다. 둘째, 현재와 같은 다당제 형태의 대의민주주의는 자본주의의 병폐를 해결할 수 없다. 다시 말해, 민주주의는 다시 발명되어야 한다.
8 <더 와이어>, 이 아무 일 없는 시대에 해야 할 일
9 시기와 분노를 넘어서
10 미래가 보내는 징후
확실한 돌파구가 없는데다, 지배 엘리트는 명백히 통치력을 상실하고 있다. 더욱 불안한 것은 민주주의마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분명한 사실이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는 너무 이상적인 꿈이어서가 아니라 너무 '미래적'이어서 문제였다. 마르크스가 구상했던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의 이상화된 이미지, 자본주의 없는 자본주의, 즉 이익과 착취가 없는 확대 재생산으로 남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마르크스에서 헤겔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를 인도하는 어떠한 숨은 목적론도 없고, 모든 개입이 곧 미지의 세계로의 도약이며, 따라서 결과가 언제나 우리 기대를 좌절시키는 그러한 사회적 과정에 대한 '비관적' 견해로 말이다.우리는 이러한 열린 가능성을 충분히 수용하면서, 미래가 보내는 모호한 징후에 의거하여 스스로를 이끌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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