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인류학

[곰에서 왕으로(국가 그리고 야만의 탄생)], 나카자와 신이치, 김옥희, 동아시아, 2005, (150323).

바람과 술 2015. 3. 24. 23:13

머리말 카이에 소바주에 대해서

서장 뉴욕에서 베링 해협으로

신화를 이야기하던 사람들은 동물을 '야만'스럽다고 생각하거나 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동물들은 '자연' 상태 그대로 살고 있는데, 덕분에 인간이 쉽게 접할 수도 손에 넣을 수도 없는 '자연의 힘'의 비밀을 쥐고 있는 겁니다. 이 세계의 진정한 권력을 쥐고 있는 것은 오히려 동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신화나 제의를 통해서, 즉 '최고의 철학'의 사고양식을 통해서 동물과의 사이에 상실된 유대관계를 회복하고, '자연의 힘'의 비밀에 접근하고자 했습니다. 대칭성 사회에서는 권력은 원래 인간의 소유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셈입니다. 그런데 국가의 탄생과 동시에 그런 관계가 깨지고 맙니다. 국가라는 체제 속에서 살고 있는 인간은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김과 동시에, 원래의 동물의 소유였던 '자연의 힘'의 비밀마저도 자신의 수중에 넣으려고 했습니다. '문화'는 본래 '자연'과의 대칭적인 관계를 유지할 때 비로소 의미를 갖는 것이었는데, 지금은 대칭성의 균형을 상실한 '문명'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동시에 '문명'과 '야만'의 차이도 의식하게 된 셈입니다.


제1장 잃어버린 대칭성을 찾아

제2장 태초에 신은 곰이었다


인간이 곰으로 변하거나, 곰 안에서 '인간적인 요소'를 발견한다는 식의 이런 사고법이야말로 구석기 시대 이래 현생인류 특유의 것이며, 모든 생물의 종 중에서 인류를 '인간'답게 하는 가장 '인간적'인 사고법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이 곰으로 변모할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이 오래된 신화야말로 인류의 마음에 일어난 혁명적인 변화의 희미한 여음을 전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상징사고란 서로 다른 분야의 것들 사이에서 뭔가 공통점을 발견하고, 그것을 토대로 서로 다른 것들을 하나로 겹쳐서 이해하려 하는 지적 능력을 의미합니다. '시클라멘의 꽃말은 정숙함'이라는 말이 있을 경우, 식물의 종과 사람의 인격이라는 서로 다른 카테고리가 하나로 중첩되어 매우 '정숙한 여성'을 만났을 때 "당신은 시클라멘과 같은 분이군요"라는 표현이 나오게 됩니다. 이와 같이 상징적인 표현은 서로 다른 의미의 장 사이에 통로를 열어줍니다. 자유로이 올겨다닐 수 있는 지성의 작용이 없으면 활동이 시작하지 않습니다. 


제3장 '대칭성의 인류학' 입문


인간이 알고 있는 모든 언어가 은유의 축(파라디그마 Paradugma 축)과 환유의 축(신타그마 Sintagma 축)의 조합에 의해 이루어져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외의 언어는 없는 셈입니다. 따라서 언어는 인간의 징표라고들 하는데,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언어를 가능하게 하는 '비유'능력이야말로 인간의 징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그것을 가능케 한 유동적 지성의 활동이야말로 가장 근원적인 인간의 징표라고 할 수 있겠지요. 시는 '비유'의 힘을 충분히 이용해 서로 다른 영역에 속해 있는 것을 자유로이 결합시킵니다. 최초의 의식은 시를 감상하듯이 세계를 이해했습니다. 유용성을 중시하기 시작하면 그런 점은 순식간에 보이지 않게 됩니다. 


신화적 사고도 은유나 환유와 같은 '비유' 능력을 충분히 활용하고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신화는 시보다 더욱 더 웅대한 철학적 의도를 갖고 이 세계를 '상징적 숲'으로 바꾸고자 하는 겁니다. 신화적 사고에서의 '전체성'은 현대의 에콜로지에서 말하는 '전체성'과 동일한 것이 아닙니다. 에콜로지는 인간은 인간, 곰은 곰, 그 위에서 모두 모여 서로 공생하고 있다는 의미의 '전체성'이지만, 대칭성 사회의 사람들은 인간과 곰(을 비롯한 모든 동물들)이 서로의 존재를 유동적으로 왕래할 수 있는 유동적인 생명의 레벨까지 내려가서 거기서 '전체성'을 사고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제4장 해안의 결투


비대칭의 관계는 자발적인 커뮤니케이션의 흐름을 방해하거나 끊어버립니다. 대칭성의 관계가 존재하는 곳에는 강제나 의무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가진 좋은 것을 상대방에게 서로 주고 싶어하는, 대범하고 자유로운 커뮤니케이션을 바라는 마음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일단 비대칭성의 폭력이 도입되어 대칭성의 관꼐가 무너져버리면, 신기하게도 그런 너그러운 마음은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립니다. 


제5장 왕이 되지 않은 수장


사고를 할 때도 현실의 생활 속에서도 대칭성을 유지하고자 했던 사람들의 사회의 리더는 수장으로 불렸는데, 그들은 대개의 경우 정치권력 같은 걸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사람들에게 강제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원 일치'를 원칙으로 참을성 있게 교섭해가면서 사회로부터 힘이나 긴장의 편중의 제거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수장에게 일종의 '위신'이라는 게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수장이 어떤 힘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이해관계를 떠나서 공정한 입장에 설 수 있는 '올바른 마음'의 소유자이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게다가 수장은 재판관도 아닙니다. 판사나 재판관처럼 쌍방의 주장을 듣고 판정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양자가 타협할 수 있도록 해결책을 찾아내서 "이쯤 해서 타협을 하는 게 어떤가?" 하고 제안하는 것이 수장의 역할입니다. 수장은 판결이나 재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교섭이나 조정에 의해 평화를 실현하고자 노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수장의 의무로 되어 있는 '베풀기'라는 특징은 '탐욕'에 대립되는 '문화'적인 성격을 갖습니다. 


수장이라는 존재는 말솜씨에 의해 평화를 유지시켰으며, 노래나 춤으로 모두를 즐겁게 하면서 조화로운 사회를 만들려고 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런 사회에서는 수장이 장군의 자리에 머무르거나, 군사력이나 신비한 권력(이 권력을 갖고 있는 것이 샤먼입니다)을 겸비한 수장이 되는 것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즉 대칭성 사회에 있어서 수장은 결코 '왕'이 될 수 없었습니다.  

 

제6장 환태평양의 신화학으로 Ⅰ


제7장 환태평양의 신화학으로 Ⅱ


제8장 '식인'으로서의 왕


인지고고학의 연구에 따르면, 현생인류의 뇌에는 특화된 기능을 가진 영역 사이를 자유로이 움직여갈 수 있는 유동적 지성을 발생시키는 뉴런의 새로운 조직화가 일어남으로써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것과 같은 능력(상징능력)이 획득되었다고 합니다. 그럼으로써 서로 다른 영역에 속해 있는 것을 중첩시켜서 이해하는 '암유'나 '환유'의 능력이 생기고, 그것을 조합해 '언어'나 '상징'을 사용할 수 있게 된 셈입니다. 그때 동시에 유동적 지성 자체에 주목한 사고는 거기에서 뭔가 엄청나게 강력한 '초월적' 존재를 직감했을 겁니다. 유동적 지성은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가 정해져 있지 않아 사고에 포착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전자의 능력으로부터는 상징 표현을 조합해 사고하는 '야생의 사고'가 탄생했습니다. 그러나 후자의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주목으로부터는 그것과는 다른 관심이 발생하겠지요. 그것은 형태를 가진 것을 먹어치우는 것이 가능한 존재입니다. 구체적인 세계를 초월해서 어떤 사고에 의해서도 억제할 수 없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자연'의 소유였던 권력=권능이 어떤 특별한 인간에게 속하는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됩니다. 이 순간 대칭성 사회('차가운 사회' 혹은 '역사를 갖지 않은 사회', '국가에 맞서는 사회'라고 불리는 경우도 있습니다)를 지탱하고 있던 윤리 구조에 붕괴가 일어납니다. 겨울 제의를 지내는 기간중에는 개인은 사회적 아이덴티티를 일시적으로 상실해, 인간보다도 훨씬 커다란 권력에, 좀더 정확히 말하면 엄청나게 큰 '입'에 잡아먹히게 됩니다. 제의를 위해 특별히 지정된 시공간을 벗어나면, 곧 수장이 지도하는 '문화'의 세계가 돌아옵니다. 하지만 '식인'으로 상징되는 자연 권력을 스스로 몸 안에 체현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왕이 출현하면, 겨울 제의에서 보았던 '개체성의 부정'이라는 것이 일상 속에서도 행해지게 됩니다. 그 동안 가족이나 지연, 친족과의 관계 네트워크 속에서 주어진 위치에 의해 자신의 입지를 확인하던 개인은, 이제 그런 구체적인 인간관계에 의해 이루어지는 사회보다는 크나큰 권력, 즉 사회를 초월한 권력(이것을 나라라고 합시다) 하에서 개체성을 상실하고 나라에 소속되는 백성으로 변화해갑니다. 왕은 사회 속에 상주하는 '식인'입니다. 이 새로운 유형의 '식인'에게 잡아먹힌 사람은 스스로는 이해할 수도 제어할 수도 없는 힘에 의해 나라의 일원으로 변신합니다. 또한 겨울 제의에서는 '식인'이 삼켜버린 사람은 스스로도 '식인'이 되어 사회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존재가 되지만, 왕의 권력이 삼켜서 먹어버린 사람은 사회 밖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 '식인' 정령과 왕의 차이가 있는 겁니다. 이런 차이는 인간을 잡아먹는 왕의 '입'은 사회의 내부에 고정되어 있다는 점에서 비롯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왕에게 잡아먹혀 나라의 백성이 된 순간은, 그 순간 자신의 자율적인 힘의 일부를 상실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출현하게 된 왕은 같은 사회의 주변을 떠도는 샤먼과 전사의 기능을 자신의 권력의 내부로 수용하게 되겠지요. 샤면도 전사도 보통 사람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강도의 힘이 가득 차 있는 영역으로 들어가 활동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 역시 '식인'의 일종이므로 사회의 중심부로 진출한 왕과는 가까운 사이입니다. 이렇게 해서 '식인'+샤먼+전사는 그때까지 사회의 지도자였던 수장의 지위마저 빼앗아, 결국 '사회의 내부로 들어오게 된 자연권력=왕권'을 체현하는 존재로서 왕이 등장합니다. 


'야만'은 그렇게 탄생하였습니다. 동물들에게는 조금도 야만스런 면이 없습니다. 게다가 그런 동물들과 가능한 한 대칭적인 관계를 유지하고자 했던, 그리고 신화에 의해 철학을 하던 사람들도 전혀 야만스럽지 않았습니다. 동물을 죽일 때도 상대방의 존엄을 해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으며, 필요 이상의 동물을 죽이는 것도 금지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칭성 사회의 사람들이야말로 바로 이 '아나키즘'의 실천자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들 사회의 세속적인 시간의 리더인 수장은 산뜻한 말솜씨로 사람이 지켜야 할 덕스러운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절대로 야만스런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며 매일 아침 훈시 때마다 부족 사람들을 고무시킵니다. 요컨대 그 사회에는 권력 따위는 존재하지 않고, 단지 시간과 공간이 한정되어 있는 제의의 장에서만('자연'의 힘에 유래하는) 권력이 표면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가능할 뿐입니다. 수장의 권위를 유지해주는 것은 이성의 일종입니다. 반면 왕의 권력은 성대한 종교적 의식에 의해 연출되어야 합니다. 왕권은 이성과는 다른 종류의 힘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원래는 '자연'의 소유였던 권력을 사회의 내부에 있는 왕이 체현하는 것이 왕권이므로, '대립하는 것의 일치'를 당당하게 연출할 수 있는 종교적 제의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왕의 권위를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나라가 내리는 명령이나 결정에는 어딘가 비인간적인 면이 있게 마련입니다. 이성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명령이나 결정도 나라가 내리는 것이라면 따를 수밖에 없다는 마음의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칭성 사회에서는 이런 불합리한 사태가 가능한 한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방책이 취해졌습니다. 그들은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는 '문화'에 의해 운영되어야만 한다고 확신하는 아나키스트였기 때문에, '자연'의 것은 '자연'에게 되돌려주고자 했습니다. 이로 인해 오늘날의 세계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심각한 혼란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때까지 대칭성 사회에서는 '문화'와 '자연'은 이질적인 원리로 간주되어 가능한 한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자연'의 것인 권력=능력을 사회의 내부로 들여온 왕이 존재하는 세계에서는, 이런 분리가 불가능해집니다. 왕 스스로가 '문화'와 '자연'의 이종교배에 의해 탄생했으며, 나라의 권력 역시 동일한 이종교배의 원리에 의해 구성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이종교배에 의한 구성체에 부여된 이름이 바로 '문명'입니다. 야만은 여기서부터 발생합니다. 왕과 같은 존재를 허용한 순간부터, 인간은 마치 힘의 비밀을 '자연'으로부터 빼앗기라도 한 듯이, 그때까지 소중하게 여겨오던 경건한 마음가짐을 상실하고, 동물이나 식물도 단지 인간의 필요를 위해 존재하는 대상으로만 보게 되겠지요. 인간은 동물들에 대해서 대칭성 사회의 사람들이 들으면 부들부들 떨 정도로 야만적인 행동을 하게 되었는데, 그와 함께 국가가 저지르는 온갖 형태의 야만이 활개를 치게 되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오늘날 지구화를 주도하고 있는 거대국가는 '문명'에 적대적인 '야만'과의 싸움을 전세계에 부추기고 있습니다. 야만을 낳은 건 바로 문명입니다. 국가가 야만을 박멸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국가는 야만의 발생을 토대로 형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종장 '야생의 사고'로서의 불교


카스트는 본래 '피부색'에 의한 인간의 분류'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카스트 제도는 비대칭의 원리에 따라서 사회를 형성하고자 합니다. 깨끗한 것부터 더러운 것까지 종사하는 일에 의해 인간을 분류하고, 그것을 계층으로 고정시켜 사회를 만듭니다. 이것만 봐도 카스트 제도가 관념이나 추상성에 위위를 부여하는 사상에 근거한 사회 시스템이라는 걸 알 수가 있습니다.


불교는 오랜 역사 속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불과 법과 승의 세 가지입니다. 이 세가지 기본을 통해서 '마음의 내면의 공화제'로서의 불교를 확인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우선 불(불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부처는 '왕'이 아니라 '승자'라고들 합니다. 왕은 '문화'를 능가하는 권력을 소유합니다. 마을 수장들은 '문화'의 원리에 의해 마을이나 공동체의 평화를 유지하고자 하지만, 왕의 권력은 '초문화'적인 명령하는 힘으로써 그것을 삼키려고 합니다. 부처는 이런 왕의 권력을 부정해버립니다. 법(달마)에는 이 점이 좀더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국가 탄생 이전의 대칭성 사회에서는 '자연'은 인간이 행하는 '문화'적 행위를 무화시키는 힘을 갖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인간은 '문화'의 원리에 따라 자신들이 살아갈 공간을 '자연' 한가운데에 만들지만, 그것은 안팎에서 끊임없이 가해지는 '자연'의 위협에 방치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문화'는 내부로부터의 위협에도 방치되어 있습니다. 태초부터 '자연'은 항상 '문화' 무화시키는 힘을 드러내고 있었던 셈입니다. 부처는 '자연'이 갖고 있는 이 힘을 새롭게 개념화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바로 그것이 '공'입니다. '공'은 동시대의 인도 철학자들을 부들부들 떨게 할 정도로 위력을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인도철학은 '있다=존재한다'라는 개념을 토대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부처가 주장하는 '공'은 그 토대마저 무화시키고자 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권력 자체도 모호해지게 됩니다. 그럼으로써 인간사회의 내부로 들어와 실체를 가진 힘인 듯이 설쳐대던 권력은 환상의 베일이 벗겨져 다시 순수한 힘으로 돌아가 '자연'의 영역으로 반납됩니다. 권력을 '자연'의 영역으로 돌려보낸 후에 인간에게 남는 것은 겸손과 타자에 대한 공감에 근거한 올바른 삶이 되는 셈인데, 바로 이것이 인디언 수장들이 매일 아침 훈시에서 이야기하던 '문화'의 이상입니다. '자연'과 '문화'의 이종교배에 의해 탄생한 권력이 이 순간 해체됩니다. 세 번째가 승려의 공동체 상가입니다. 권력을 무화시키고 내부를 이상적인 공화제로 다진 승려의 공동체가, 국가의 비호를 받으며 그 안에 존재하는 기묘한 현상이 여기에서 발생하게 됩니다. 국가 안에 '국가에 맞서는 사회'가 들어가 있는, 그야말로 해체적인 상황을, 부처가 시작한 정신적 전통이 연출한 셈입니다. 대칭성에 근거한 사회에 대한 부정에 의해 국가가 탄생했는데, 불교의 상가는 국가 안에 국가를 부정하는 공동체를 확실하게 정착시키고자 했던 셈이므로, 이것은 거의 블랙유머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의 골격은 '불/법/승'이 하나가 되어 완성되었습니다. 세 가지의 기본이 전부 동일한 원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대치성 사회를 부정하고 멸망시켜 탄생한 국가라는 형태가 비약적으로 발달한 시대에, 불교는 권력을 무화시켜 '자연' 속으로 돌려보내고, 그럼으로 해서 권력이 낳은 야만을 소멸시키고자 했습니다. 


'야생의 사고'와 불교와의 관계를 생각하면서 부처에 위한 '공'의 가르침의 본질을 생각해보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인도의 사상가들은 세계에는 실재가 없지만, 그 세계를 파악하고 있는 자신(아트만)만은 마지막 남은 실체로서 '존재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부처는 그것조차도 부정하며, 사고하고 있는 자신마저도 없다고 했습니다. 불교라는 '보편종교'를 이루고 있는 원리 중에는, 국가를 갖지 않은 대칭성 사회의 중요한 구성원리 중에서 국가의 탄생 이후로 계속 억눌린 채 별로 조명을 받지 못한 몇 가지가 문명적으로 세련되게 다듬어져 거듭났습니다. 거기에다가 원래 '공'의 개념은 권력과 관계가 있는 모든 것을 무력화시키는 사상의 도구로서, '자연'이 내장하고 있는 힘의 개념에 고도의 철학적 세련미를 가해서 생긴 것이기도 했던 셈이다.                  

 

보론 곰을 주제로 한 변주곡


역자 후기 '문명'과 '야만'으로의 새로운 접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