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인류학

[종교와 스포츠 몸의 테크닉과 희생제의], 이창익, 살림, 2004, (150408).

바람과 술 2015. 4. 8. 10:59

몸의 교육학과 몸의 연금술


상상의 힘만으로도 인간은 죽을 수 있다. 공포심만으로도 인간은 죽을 수 있다. 금기의 위반으로 인해 생긴 죄의식이 사람을 죽게 만들기도 한다. 1835년에 마오리족에 의해 정복당한 모리오리족은 강제로 남쪽 섬으로 옮겨졌으며 곧 대부분이 죽고 말았다. 부족원의 수가 2,500명에서 25명으로 급감한 것이다. 마오리족이 모리오리족을 살해한 것이 아니다. 마오리족이 모리오리족에게 강제로 시킨 많은 일들로 인해 모리오리족은 그들의 수많은 금기, 즉 터부를 위반할 수밖에 없었다. 모리오리족은 금기 위반이 초래한 도덕적 죄의식으로 인해 괴로워하다가 매일같이 죽어나갔던 것이다. 우리는 흔히 종교가 죽음에 대한 구원론을 제시한다고 믿는다. 즉, 종교는 생전과 사후의 연속성을 보증하고 죽음의 무화로부터 인간을 구원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위의 사례는 반대로 종교적인 관념이 얼마나 쉽게 사람들을 죽게 만들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마르셀 모스가 이야기하는 원주민들의 경우, 마법에 걸렸거나 치명적인 죄를 지었다고 믿는 순간 개인은 생명에 대한 모든 통제력을 상실한다. 이러한 설명은 죽음이 단지 생리학적인 현상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저주의 말을 들으면 죽는다는 관념도 사회적인 교육과 학습의 결과이다. 도덕과 종교에 의한 죽음 관념이 심리적인 공황 상태를 유발하고 이로 인해 신체적인 기능이 마비되고 정지하는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각 사회마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 나름의 독특한 '죽음의 교육학'이 존재한다. '죽음의 교육학'이 존재한다면 반대 개념인 '죽음의 치유학' 또한 존재할 것이다. 의례를 통해 질병이 치유될 수 있다는 믿음은 일정 부분 종교적인 교육의 산물이다. 인간의 몸은 사회적인 환경과 분리된 독립적인 것이 아니다. '몸-정신-사회'는 항상 서로 교류한다. 그러므로 위에서 언급한 죽음 현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생리학'의 몸과 '심리학'의 정신과 '사회학'의 종교와 도덕이라는 세 가지를 동시에 고려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의 몸을 사물처럼 다루는 데 길들여져 있다. 그래서 우리는 사물을 다루는 '사물학'을 '인간학'에 적용하여 인간 현상을 설명하곤 한다. 몸이 어떤 고유한 본질을 지닌 채 천부적으로 운명지어졌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몸에 대한 믿음과 그와 관련된 현상의 대부분은 역사-문화적인 상상력에 의해서 빚어진 것이다. 특히 종교의 역사 안에서 우리는 인간이 몸에 대해서 전개해 온 다양한 '몸의 상상력'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인간의 욕망이나 본능이 타고난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오해하곤 한다. 몸의 욕망과 본능 또한 타고난 것 이상으로 교육되고 학습된 것이다. 식욕, 성욕, 수면욕 또한 교육과 학습의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욕망에 대한 담론들이 가장 쉽게 범하는 오류는 자꾸만 '순수한 욕망'의 존재를 가정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순수한 욕망'이란 논리적으로만 존재할 뿐 실제로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인간적인 어떤 것도 자기 인식이나 타자 이해를 위해 불변적인 토대로써 기능을 할 만큼 충분히 안정적이지 않다. 보편이란 단지 '집단적인 기억'의 산물일 뿐이다. 그러므로 몸에 대한 우리의 관념에 문제가 있고, 그래서 문제 많은 몸을 문제없는 몸으로 변화시키는 데 장애가 있다면, 우리는 먼저 몸에 대한 기억을 수정해야만 한다. 


상징은 그 자체의 특유한 사회적 생명력을 가지고 있으며 '정신적인 울림'에 의해 무한히 자산을 증식시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동일한 상상력과 상징을 갖는다는 것은 결국 동일한 '사회적 본능'을 학습했다는 의미이다. 상징은 집단적인, 즉 사회적인 산물이다. 감각자료는 단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선별적으로 취해지는 것이다. 우리는 지각하는 법조차도 학습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익숙한 현상이라 할지라도 다른 사람에게는 지극히 낯선 현상으로 읽혀질 수 있다. 현재 우리는 종교를 '선택(choice)'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단'을 의미하는 영어단어 'heresy'는 본래 '선택'을 뜻하는 'hairesis'라는 희랍어로부터 유래한 말이다. 자의적인 '선택'이란 정해진 규칙대로 하지 않는 것, 즉 '이단'이었다. 그러므로 종교를 선택할 수 있다는 발상은 지극히 근대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종교는 신성과 만나기 위해서 몸을 이용하는 다양한 방법을 사용해 왔다. 여기에서 인간의 유한한 몸을 신적인 몸으로 변형시키고자 하는 노력, 즉 '불사의 몸'에 대한 향수가 짙게 배어 있다.    


호모 두플렉스 : 집단적 구원론과 개인적 구원론


인간은 이중적인 존재이다. 인간은 특이성과 자발성과 창조성을 가진 자유로운 주체로서 자기의 몸과 인격을 창조하는 '개별적인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은 보편적이고 예측가능한 행동양식을 습득하여 사회가 요청하는 일정한 역할을 수행하는 '사회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인간은 생물학적 본능과 의식을 지닌 '개별적인 존재'일 뿐만 아니라, 도덕성을 지닌 '사회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에밀 뒤르켐은 이러한 이중적인 존재 방식을 가진 인간을 '호모 두플렉스', 즉 '이중적인 인간'이라고 명명한다. 뒤르켐은 개인적인 존재가 사회적인 존재에 의해 길들여지지 않을 때 사회는 무규범 상태인 '아노미'에 빠져들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런 맥락에거 보면 개인은 '카오스'이고, 사회는 개인의 본유적인 '카오스'를 정화하고 거기에 질서를 부여하는 후천적인 '코스모스'인 셈이다. 뒤르켐에 의하면 의례와 축제가 사회적인 인간을 형성하는 중요한 수단이 된다고 한다. 집단 구성원이 함께 모여 만들어내는 '의례적인 열기'야 말로 개인적인 인간이 사회적인 인간으로 변형되는 주요 수단인 셈이다. 이러한 뒤르켐의 주장에서 우리는 오로지 사회를 통해서만 개인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사회적 구원론'을 발견한다. 우리가 그토록 익숙하고 당연하게 생각하는 '개인'이라는 관념은 근대의 탄생과 더불어 서서히 정교하게 다듬어져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개인이라는 관념이 존재하지 않았거나 전혀 중요하지 않았던 사회에서는 '개인의 자유'라는 문제 또한 제기될 수 없었을 것이다. 루터는 자유롭고 종교적인 개인으로서의 '내적 인간'과 사회적으로 조건지어진 세속적인 인간으로서의 '외적 인간'을 구별한다. 그리고 인간은 '내적 인간'을 통해서만 신과 소통할 수 있으며, 인간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 또한 '내적 인간'의 자리에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외적 인간'은 사람마다의 '차이'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것이지만, '내적 인간'은 절대자인 신과 교류할 수 있는 인격으로서 전체 인간의 '동일성'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내적 인간'에 대한 주장으로 인해 모든 사람은 신 안에서 하나라는 평등의 논리가 생겨난다. 가장 중요한 점은 인간의 본유적인 '동일성'을 가정함으로써 신과 일대일로 결판을 짓는 '개인적 구원론'이 가능해졌다는 사실이다. 


초기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가 재림하여 머지않아 최후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신앙의 핵심으로 삼았다. 원래 이러한 최후의 심판은 '종말론'과 이에 따른 '집단적 구원론'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재림이 계속해서 지연됨에 따라 우주론적이며 집단적인 종말론은 설득력을 잃게 되었다. 그리하여 차후로는 '종말론'보다는 '개인의 죽음'이 더 중요한 종교적인 사건으로 취급되었다. 이를 통해 그리스도교 신앙이 '개인의 죽음'과 '영혼의 구원'이라는 틀로 재편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개인이 영혼이 종교의 핵심으로 자리잡기 시작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개신교라고 부르는 프로테스탄티즘은 기원상 몇 가지 특징을 지닌다. 첫째, 인간을 영과 육 혹은 정신과 신체로 구분하는 극단적인 이원론이 있다. 피부색, 인종적 특이성, 개인의 신체적 특징 같은 육체의 영역은 사람들을 구분하고 분열시키는 차이를 만들어낸다. 따라서 가시적인 육체는 사람들의 위계는 차이를 결정하는 세속적인 것이 된다. 육체는 너무도 명확한 차이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어떻게 손을 쓸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정신은 비가시적인 것이기 때문에, 정신의 동일성에 대한 가정은 사람들을 '인간'이라는 하나의 범주로 묶어낼 수 있는 힘을 갖는다. 육체는 서로 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은 동일하다는 가정, 바로 이 지점에서 프로테스탄티즘은 육체의 영역을 포기하고 정신의 영역으로 옮겨갔다. 차후로 프로테스탄티즘은 몸을 신과 만날 수 있는 성스러운 몸으로 변형시키는 '몸의 테크닉'을 포기하고, 오로지 신을 만나기 위해 필요한 성스러운 정신만을 연마하는 '정신의 테크닉'인 것이다. 둘째, 이로 인해 '신화'와 '의례'의 이분법이 생겨난다. 프로테스탄티즘에서 '성서'로 대표되는 의례와 순전히 인간이 만들어낸 것으로서 인간이 삼히 신의 의지를 제어하겠다는 발상을 담고 있는 주술이 된다. 의례의 핵심에는 그저 규칙대로만 하면 원하는 일이 이루어진다는 믿음이 내재해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종교'와 '주술'의 이분법이 도출되는 것이다. 요약하면 종교는 '정신의 테크닉'으로, 주술은 '몸의 테크닉'으로 평가되었던 것이다. 이로써 프로테스탄티즘에 의해 의례에서 신화로 종교의 중심 이동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던 셈이다. 셋째, '성서'와 '우상'의 이분법이 도출된다. 의례에서 숭배의 대상이 되는 '성상'은 비가시적이고 무한한 신을 가시적이고 유한한 물질에 가두어 타락시키는 '우상'으로 평가된다. 모든 '성상'이 '우상'으로 번역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프로테스탄티즘의 신화중심주의는 '성서중심주의'로 귀착되고, 빈-의례주의는 '성상파괴주의'로 귀결된다. 이처럼 프로테스탄티즘의 종교개혁은 종교의 영역으로부터 '의례'와 '성상'을 제거하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탈-의례화 과정을 통해 종교는 '몸의 테크닉'과 관련된 몇 가지 중요한 핵심 요소를 상실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는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금욕주의, 에로티시즘, 엑스터시, 빙의와 같은 '종교적인 몸'들이 폐기되었던 것이다. 금욕주의라는 뜻을 가진 영어 단어 asceticism의 어원은 그리스어 'askesis'이며, 이 말은 군인과 운동선수의 육체적인 '훈련'을 의미한다. 금욕주의는 몸보다는 정신을 우위에 두는 우열의 이원론에 기반한다. 그러나 금욕주의가 비록 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통해 형성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이면에 주목해야 한다. 금욕주의는 몸보다는 정신을 우위에 두는 우열의 이원론에 기반한다. 그러나 금욕주의가 비록 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통해 형성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이면에 주목해야 한다. 금욕주의는 '몸의 훈련', 즉 '몸의 테크닉'을 통한 구원이라는 관념을 중심으로 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프로테스탄티즘은 '금욕에 의한 구원' 아니라 '은총에 의한 구원'을 강조했다. 다시 말해서, 구원은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의 선택'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 되었다. 금욕주의는 몸의 훈육을 통해 정신을 성스럽게 조형하는 것이다. 이때 몸은 정신의 거울이 되며, '몸의 테크닉'은 항상 '정신의 테크닉'을 의도한다. 세속적인 몸은 욕망으로 뒤엉켜 있는 것이어서 성스러움을 감당할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이 성스러우멩 참여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몸을 먼저 성스럽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금욕주의에서 '몸의 성스러움'은 '정신적인 성스러움'과 등가적인 것이다. 그러나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몸의 테크닉'은 '정신의 테크닉'으로부터 분리되었다. 즉, '몸의 테크닉'은 세속의 영역에, '정신의 테크닉'은 신성의 영역에 할당된 것이다. 수도원 운동이 '몸의 테크닉'을 사회로부터 분리시켰다면, 종교개혁은 다시 '몸의 테크닉'을 종교로부터 분리시켰다.


네번째 그것은' 경전'과 '번역'의 문제이다. 종교개혁은 인쇄술의 발달과 '번역주의'에 근거한 것이다. 이로써 성서의 말씀을 통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성서중심주의'가 가능해졌다. 또한 '성서중심주의'는 의례보다는 신화를, 실천보다는 믿음을 강조함으로써 '신앙중심주의'를 가져왔다. 성서의 소유와 '독서'가 일대일의 개인적인 구원론에 미친 영향력을 분명히 과소평가할 수 없는 것이다. 다섯 번째로 언급할 것은 '만인사제설'이다. 세속적인 인간이 혼자서 맨몸으로 성스러운 힘과 직접 대면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을 통해 사제와 사원은 불필요한 것이 되었다. 누구나 성서를 통해 신의 말씀과 직접 만날 수 있는 길이 열렸기 때문에, 이제 누구나가 사원이자 사제였던 것이다. 이로써 사원에서 사제가 주관하는 의례에 직접 참여하는 '신체적인 개인'이 아니라, 성서를 읽고 정신 공간 안에서 기도를 통해 신과 대면하는 '정신적인 개인'이 탄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여섯 번째로 언급할 것은 '기도'가 의례의 중심축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원래는 의례의 한 요소에 불과했던 '기도'가 희생제의, 입문식, 신년축제 등의 기존의 복잡했던 의례들을 대체했다. '기도'는 무엇보다도 말을 중심으로 하는 의례이다. 따라서 기도는 프로테스탄티즘의 가장 강력한 의례적 장치로 기능했다. 이렇게 몸지세 의한 의례가 쇠퇴하고 말에 의존하는 '기도'의 역할이 커지면서 어떤 결과가 유발되었을까? 그것은 종교의 정신화 혹은 내면화와 종교의 개인화라는 현상을 가져왔다. 


'인간'이나 '인간성'이라는 개념 범주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에 걸쳐 서서히 형성된 것이다. 특히 '인간'이라는 범주는 그리스도교와 같이 끊임없이 타민족을 그리스도교 신자로 만들고자 했던 선교중심적인 종교에 의해 서서히 확장된 것이었다. 선교는 인간의 동질성에 대한 가정을 통해서만 효과적으로 기능한다. '너'와 '나'는 전혀 다른 것이 아니라 본래는 같았지만 우연적인 환경에 의해서, 악마의 농간에 의해서, 인간의 육체적인 욕망에 의해서, 신의 형벌에 의해 달라진 것일 뿐이라는 논리가 그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성'이라는 범주 안에서 필연적으로 모든 인간이 신의 품 안에서 하나였다는 전체주의적인 환상이 감추어져 있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개인'이라는 관념이 '인간성'이라는 보편적인 관념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모든 인류가 평균화되고 균질화되고 동질화되었을 때 비로소 '개인'이라는 관념이 인정받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근대화 과정은 세속화 과정으로 묘사되기보다는 '몸의 시계'로부터 '정신의 세계'로 종교가 후퇴했던 과정으로 보는 게 보다 정확할 수 있다. '인간성'이라는 범주는 종교적인 상상력의 산물이다.       


스포츠와 몸의 상상력


의례화된 행동은 일상행동과는 구별되는 양식화된 행동이다. 춤과 스포츠는 모두 의례화의 메커니즘을 내장하고 있다. 


서커스는 절대 따라할 수 없는 몸을 전시함으로써 일상적인 몸에 대한 관객의 생각을 재조정한다. 관객이 '몸의 가능성'에 대해 확장된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서커스의 몸은 폴 발레리가 말한 적이 있는 '상상의 몸', '진정한 몸', 즉 '네 번째 몸'이라 할 만한 그런 것이다. 폴 발레리는 몸을 네 가지로 구별한다. 첫 번째 몸은 매순간 우리가 소유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특권적인 대상으로서의 '나의 몸'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속한 하나의 사물인 양 '나의 몸'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나의 몸'에 속해 있다. '나의 몸'은 세계에 의존하면서도 세계와 대립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대상이지만, 역으로 세계가 '나의 몸'에 근거하여 펼쳐진다고도 말할 수 있다. '나의 몸'은 항상성을 지닌 듯하면서도 계속 변화한다. '나의 몸'은 그자체가 현재일 뿐, 과거는 없다. 때로 '나의 몸'의 일부분은 비교할 수 없는 쾌락과 고통으로 인해 가장 큰 중요성을 부여받는다. 우리의 '두 번째 몸'은 타인이 바라보는 몸이며, 거울이나 초상화에 의해 제공되는 몸이다. '두 번째 몸'은 형태를 가지고 있으며 예술에 의해 이해되는 몸이며, 장신구로 치장하고 갑옷을 입는 모이다. 또한 '두 번째 몸'은 사랑하고 접촉하고 싶은 몸이다. 이 몸은 나르시시즘의 몸이면서도, 노화되는 몸이다. '두 번째 몸'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몸의 표면에 대한 것일 뿐이며,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보지 않고도 우리의 피부색을 몰라도 잘 살아갈 수 있다. '세 번째 몸'은 분할되고 해체됨으로써 의학이나 과학의 대상이 되는 해부학적 신체를 가리킨다. '네 번째 몸'은 소용돌이와도 같은 것으로 우리의 감각, 상상력, 지성 외부에 놓인 미지의 현상과 관련된 것이다. 그래서 발레리는 생명과 종의 기원, 죽음의 의미, 자유로운 행위의 가능성, 정신과 유기체의 관계 등의 문제를 일거에 해결해줄 수 있는 '미지의 몸'을 가리켜 '네 번째 몸'이라고 명명한다. '네 번째의 몸'은 어떤 비존재의 화신과도 같은 것이다. 


스포츠와 몸의 테크닉


올림픽이 행한 가장 중요한 역할 가운데 하나는 '기록'과 '승리'라는 요소를 스포츠에 도입한 것이다. 근대적인 스포츠는 '기록'과 '승리'를 매개로 한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하는 명제에 의해 신체를 지배함으로써 그 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스포츠는 춤이나 서커스에서와 같이 '몸의 상상력'과 '몸의 테크닉'에 의해서 지배된다. '몸의 상상력'과 '몸의 테크닉'은 몸의 변증법의 두 축이라 할 수 있다. 


스포츠와 희생제의


근대적인 체육관, 즉 김나지움이 종교적인 사원을 모방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근대적인 스포츠는 일상 공간과는 분리된 장소에서 주로 행해지며, 분리와 단절이 갖는 특성을 최대한 활용한다. 그리고 사원과 체육관은 행동의 세부사항을 강조함으로써 큰 행위를 일련의 작은 행위들로 분할하여 미시적으로 '의례화'한다. 그러나 스포츠의 의례적 속성을 지적하는 것만으로는 근대 사회에서 스포츠가 차지하는 자리를 적절히 가늠할 수 없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선수와 관객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신체적 커뮤니케이션'의 구조를 도식화할 수 있어야만 한다. 스포츠는 일상에서 수행되지 않는 온갖 몸짓들을 종목별로 분류하여 전시한다. 스포츠의 몸은 '폭력'에 의해 정교하게 다듬어진 순수한 몸 그 자체이다. 순수한 몸이란 정신이 제거된 '몸뿐인 몸'을 의미한다. 스포츠의 폭력은 크게 두 가지 방향성을 갖는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운동선수가 자신의 몸에 행사하는 폭력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운동선수가 상대 선수에게 행사는 폭력으로 나타난다. '몸의 훈육'과 '몸의 접촉' 방식에 따라 스포츠는 다양한 양태의 폭력을 의례화한다. 이제 스포츠에 내재한 폭력이라는 요소를 고려함으로써, 비로소 우리는 스포츠와 희생제의를 유비할 수 있는 지점에 도달했다. 


'희생제의'의 어원론에서부처 출발해보자. 영어 sacrifice는 '성스럽다'를 의미하는 sacer와 '만들다'를 의미하는 facere가 조합된 라틴어 단어 'sacrificium'를 그 어원으로 한다. 희생제의는 어원론적으로 '뭔가를 성스럽게 만드는 행위'를 지칭하는 표현이다. 희생제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제물의 파괴'이다. 희생제의는 '파괴를 통한 창조'와 '살해를 통한 생존'이라는 실존의 역설이 가장 첨예하게 드러나는 현장이다. 희생제물은 희생주체를 대신하여 파괴됨으로써 희생주체를 구원하는 역할을 떠맡는다. '구원'의 관념이 없는 희생제의는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희생제의 안에서 희생제물의 몸과 정령이 하는 역할이다. 종교적인 성스러움을 획득한다는 것은 사회적인 승인을 획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희생제의를 통해 개인은 사회의 전체적인 힘과 권위를 부여받고, 사회는 사회적 규범을 재정립하는 것이다. 스포츠는 '몸의 교육학'이 연행되는 현장이다. 관객은 경기장에서 운동선수의 몸동작을 구경함으로써 '몸의 테크닉'을 전달받는다. 그리고 '몸의 테크닉'은 몸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연행함으로써 '몸의 상상력'을 조절한다.  


관객의 '몸의 테크닉'을 관람함으로써 사회적인 아비투스를 학습할 뿐만 아니라, 사회의 지고한 도덕률과 엄격한 규범을 익히게 된다. 운동선수처럼 철저히 규칙에 의해 통제되는 도덕적인 인간, 즉 사회가 원하는 성스러운 인간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역으로 운동선수의 몸을 관람함으로써 관객은 세속적인 때가 묻은 자신의 불순한 몸을 탈성화시킨다. 


희생제물은 에너지와 사유의 집중이 발생하는 장소이다. 희생제물은 인간과 신이 접합하는 만남의 장소이다. 


느린 동작의 해부학 : 의례학의 재구성


신화는 '내용'을 중시하지만, 의례는 '형식'을 중시한다. 


레비스트로스는 의례의 기본 작용을 '세분'과 '반복'으로 요약한다. 의례의 대표적인 규칙은 바로 '느림'이다. 빠름은 의례의 규칙을 위반하는 비-의례적인 것이다.


의례의 가장 중요한 또다른 장치는 '반복'이다. 의례는 같은 말과 행위를 반복함으로써 '반복의 과잉'을 실현한다. 


근대성은 종교의례의 무의미성을 견디지 못한다. 근대성의 문맥에서 무의미를 추구하는 의례는 광신과 광기의 징후였다. 따라서 근대의 종교적인 합리성은 점차 의례를 종교의 영역에서 추방했다. 그렇다면 그 많던 종교의례는 다 어디로 갔을까? 우리는 아마도 그러한 몸을 스포츠, 춤, 연극, 영화 등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의미 없이 살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은 항상 '낡은 의미'로부터 벗어날 것을 꿈꾼다. 그래서 인간은 무의미의 가능성을 추구한다. 무의미한 몸이란 낡은 몸을 제거하고 새로운 몸을 얻을 수 있기 위한 토대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