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인류학

[호모 루덴스, 놀이하는 인간을 꿈꾸다], 노명우, 사계절, 2015, (151203).

바람과 술 2015. 12. 3. 23:58

프롤로그 : 놀이의 사라짐과 현대의 비극 _ 15

Ⅰ. 호모 루덴스를 찾아 떠나는 과거 여행

1. 하위징아, 놀이하는 인간을 발견하다 _ 35

2. 원형적 호모 루덴스는 왜 놀이했을까? _ 53

놀이는 자발적인 행동이기에 역설적으로 더욱더 엄격하게 놀이 규칙에 따른다. 놀이에서 질서는 생명과도 같다. 목적을 위한 수단인 노동과는 달리 놀이는 그 자체가 목적이기에, 그 행위를 통해 도달하려고 하는 지점도 다르다. 놀이의 목적은 관념적이다. 놀이 세계에서 우리가 발휘하는 놀라운 집중력은 놀이 특유의 긴장 상태에서 나온다. 놀이는 결과를 예측할 수 없다. 놀이는 불확실성과 우연성에 의해 지배되는 세계다. 


하위징아는 놀이를 개인과 개인, 또는 개인과 집단 간의 틀로 생각했다.. 놀이 개념에서 구체적인 행위보다 관계의 유형이 매우 중요하다. 인간의 놀이는 혼자서 할 수 없다. 인간의 놀이는 사회적 현상이기에 '집단'을 전제로 한다.  


3. 중대한 결정을 놀이로 판단하는 고대 세계 _ 82

고대인에게 정의는 무거운 개념이 아니었다. 오늘날 우리에게 정의는 추상적이고 변하지 않는 원칙을 연상시키지만, 고대인에게 정의는 신의 뜻, 운명, 행운과 연결된다. 그래서 정의의 여신을 일컫는 디케(Dike)는, 우연을 통해 신의 뜻을 아는 행위인 '던지다'의 뜻을 가진 디케인(dikein)에서 유래했다. 고대인들에게 정의를 밝혀내는 것과 신의 뜻을 알아내는 것은 똑같은 의미였다. 정의는 인간의 판단이 아니라 신의 판단에 근거하기에, 무엇인가를 결정할 때 인간의 생각보다는 신의 생각을 알아내는 것이 더 중요했다. 다시 말해 고대인들은 누가 정의의 편인지 법률에 바탕을 두어 가리는 것이 아니라 신이 누구 편인지 알아봄으로써 가려낸다. 주사위 놀이처럼 전적으로 운에 따라 결정되는 방식도 상관없다. 고대인은 운을 확률 개념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운은 신의 뜻이고, 신만이 아는 미래다. 신은 자신의 뜻을 운을 통해 인간에게 알려 준다. 그렇게 이해한다면, 운에 따라 정의를 결정하는 건 전혀 우스꽝스럽지 않고 오히려 자연스럽다. 그래서 신의 뜻에 따른 판결은 놀이의 성격을 가진다. 고대 세계에서 판결이 윤리적 문제와 결합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사례는 매우 많다.  


4. 명예를 위해 결투하던 중세 이야기 _ 96

5. 수수께끼 놀이와 철학의 탄생 _ 115

아포리아(aporia)는 오늘날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 즉 난제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철학 용어다. 그렇지만 아포리아는 본래 그리스인들이 즐기던 실내 게임이었다. 아포리아는 서로 상대방에게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6. 놀이가 만드는 상상의 세계 _ 135

7. 아름다움을 두고 경쟁하는 놀이, 예술 _ 144

Ⅱ. 현대의 호모 루덴스

8. 호모 루덴스가 사라진 19세기 _ 169

9. 놀이의 원리에서 놀이의 사회학으로 _ 192

과거 신분제 사회에서 놀이와 노동은 각각 자유민과 노예에게 배타적으로 귀속되어 있었다. 따라서 노동과 놀이는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었다. 그러나 신분제가 붕괴된 오늘날 사회에서는 노동과 놀이가 한 사람안에서 서로 충돌한다. 현대 사회에서는 전적으로 노동에만 종사하는 사람도 놀이에만 몰두하는 사람도 없다. 노동과 놀이는 모든 사람이 하는 활동이다. 따라서 현대 사회에서 놀이는 노동과의 관꼐 속에서 파악된다. 현대의 놀이 영역은 박탈적 비노동부터 보편적 탈노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 위에 분포되어 있다. 오늘날 우리는 모두 노동의 의무를 지고 살지만, 하루 24시간 중에서 노동에서 벗어나는 시간이 있다. 이를 비노동 시간이라 한다. 비노동은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첫 번째는 박탈적 비노동이다. 박탈적 비노동은 노동하고 싶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노동에서 밀려난 이의 활동으로, 이는 박탈적 놀이와 짝을 이룬다. 두 번째는 제한적 비노동이다. 직업 노동은 하지만 퇴근 후에 잠시 노동에서 벗어난 상태를 말하며, 이런 자유 시간에 사람들이 몰입하는 놀이는 제한적 비노동과 관련된다. 비노동과 달리 노동을 할 필요성이 사라진 상태를 탈노동이라 한다. 탈노동은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첫 번째는 특수한 탈노동이다. 고대의 귀족이나 현대 사회의 부자처럼 특수한 조건을 갖추고 있기에 노동할 필요성에서 벗어난 사람들한테서 볼 수 있다. 두 번째는 보편적 탈노동이다. 이것은 생산력이 증대하여 인간이 힘든 노동을 하지 않아도 필요한 재화를 충분히 생산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을 때 나타난다. 특수한 탈노동과 달리 보편적 탈노동은 노동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10. 퇴근 후 자유 시간의 놀이 _ 209

11. 홀로 구축한 취미 세계의 놀이 _ 227

12. 미래를 예견하는 디지털 세계의 놀이 _244

에필로그 : 놀이가 일상이 된 세계에 대한 상상 _ 259

꿈은 꿈꾸는 자의 몫이다. 선택받은 소수가 아니라 모두가 호모 루덴스가 되는 사회는 꿈을 통해 달성된다. 꿈조차 꾸지 않는다면 우리는, 선택받은 소수만이 호모 루덴스가 되어 놀이의 즐거움을 맛보는 세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 모두가 호모 루덴스가 되는 사회는 꿈을 꾸는 사람인 호모 솜니안스(Homo somniand)가 만든다. 


주 _ 265

도움 받은 글 _ 2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