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유일한 평전], 조성기, 작은씨앗, 2005, (160923).

바람과 술 2016. 9. 23. 22:58

-1장- 유년시절

아버지 유기연의 특이한 이력

1895년 1월 15일 장남이 태어나자 유기연은 아이의 이름을 유일형이라고 지었다. '형'은 향기 형으로 향기가 멀리 풍긴다는 뜻도 가지고 있었다. 살아가는 동안 아름다운 향기를 멀리까지 풍기는 인생이 되라고 지어준 이름이었다. 유일형이 나중에 유일한으로 개명하게 된다. 


일형이 태어나던 해

일형의 어린 시절

9세 소년 미국으로 가다

-2장- 또 다른 세상

초등학교 시절부터 고학의 길

네브라스카주 커니의 독신 자매 집에서

헤스팅스 한인 소년병 학교

고교 미식 축구선수가 되다

100불을 갚기 위해 변전소 취업하다

-3장- 세상을 향해 한 걸음 앞으로

앤 아버(Ann Arbor)의 로맨스와 사업 시작

3.1 만세 운동과 재미 독립운동가들

필라델피아 한인 총대표회의에서 헌법 기초를

미시건의 숙주나물 신화와 북간도의 콩죽

21년 만의 가족 상봉

-4장- 조국에서의 출발

유한양행 출발하다

국민 건강과 직결된 초기 제품들

여기에 맞서 한국의 약종상들도 자구책을 마련하여 1913년 '조선매약 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양종상 친목단체인 약업총합소 한약업자들이 현대의학 교육을 목표로 '조선약학 강습소'를 1915년에 세우기도 했다. 그 강습소는 나중에 서울대학 약학대학으로 발전하게 되는데, 한약업자들이 양악업자들을 키우는 대학을 세운 셈이어서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게 한다. 


유한양행은 한국어 신문에 개업 광고를 내기도 전에 조성총독부 영문기관지인 'Seoul Press'에 11927년 9월 27일 최초의 제품 광고를 영문으로 실었다. 'Island Palm'이라는 세수 비누 광고였다. 


사연 많은 일한의 남매들

세계 대공황 속에서 만주로

간이역 마을까지 달려가는 봉사 정신

유한양행의 기업정신인 셈이었다. 첫째, 항상 국민보건을 위해 일해야 한다. 둘째, 우리 민족이 일본 민족보다 못하지 않다. 민족의 긍지를 가지고 일해야 한다. 셋째, 유한(양행)은 결코 개인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를 위해서 있는 것이며 이 길을 통하여 경제수준을 높여야 한다. 


기업은 개인의 것이 아니다

정성껏 좋은 상품을 만들어 국가와 동포에 봉사하고 정직 성실하고 양심적인 인재를 양성 배출하며 기업 이익은 첫째, 기업을 키워 일자리를 만들고, 둘째 정직하게 납세하며, 셋째는 그리고 남은 것은 기업을 키워 준 사회에 환원한다. 


여러 기독교 교단들이 신사참배를 총회에서 가결하게 되고, 급기야 조선예수교 장로회도 1938년 9월 10일 제27회 총회에서 불법적으로 신사참배를 가결하였다. '아등은 신사가 종교가 아니요 기독교의 교리에 위반하지 않는 본의를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을 자각하여 이에 신사참배를 솔선 여행하고 추히 국민정신 총동원 운동에 참가하여 비상시국하에 총후 황국신민으로서 적성을 다하기를 기함.' 일한이 한국에 와서는 교회와 일정한 거리를 둔 것도 신사참배에 동조하는 교회 분위기가 싫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청년들이여 성병을 조심하라

-5장- 청렴한 기업정신

미국에서 OSS 특수훈련 받다

해방 정국의 갈등

6.25 전쟁에서 살아남기

회사 재건과 교육사업을 위하여

유한의 정신과 신조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힘을 다하여 가장 좋은 상품을 만들어 국가와 동포에에 도움을 주자. 그렇게 하기 위하여 첫째, 경제수준을 높이며 둘째, 한결같이 진실하게 일하고 셋째, 각자와 나라에 도움이 되도록 하자. 그러므로 각 책임인들은 항상 참신한 계획과 능동적인 활동으로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하자.'  


탈세와 정치자금은 없다

제약업계 최초로 주식 공개

유한양행은 1962년 11월 1일 한국 제약업계 최초로 주식을 상장하였다. 민간기업체로서는 두 번째요, 국영기업체까지 합해서 따져도 다섯 번째였다. 1974년 5.29 대통령 특별지시에 의해 기업 공개촉구가 있기 12년 전에 일한은 이미 선구적인 발걸음을 뗀 것이었다. 그때 총자본금은 1962년 6월 단행된 화폐개혁으로 8천만 원이 되었다. 일한은 주식을 공개한 후 더욱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각종 사회공익 사업과 육영사업에 힘을 썼다. 한국아동양호회, 허양아동 보호소인 광주 행복원, 무의탁 장병 위문, 이화여자대학교, 연세대학교 등 도움과 기부가 필요한 곳이면 자신의 개인 재산을 내어놓는 것도 아까워하지 않았다.  


후계자 문제와 고독한 말년

그가 외국으로 나가거나 입국할 때 출입국 신청서 직업란에는 언제나 'Educator(교육자)'라는 영문 글자가 씌어 있었다. 


일한의 인간적인 면모들

경영권을 이양하고 투병생활로

사회를 감동시킨 유언장

-부록- 유일한 연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