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글로벌화의 역사], 위르겐 오스터함멜/닐스 P. 페테르손, 배윤기, 에코리브르, 2013, (1612221).

바람과 술 2016. 12. 21. 13:37

서문


'글로벌화'라는 말은 시간적으로 펼쳐지는 변화와 역동을 가리킨다. '글로벌화'는 지구상에서 멀리 떨어진 장소 사이에 어떤 관계가 존재했는지 그렇지 않은지의 문제 이상을 의미한다. 그와 같은 관계가 어느 정도 규율과 안정성을 획득한 상황에서 그리고 그런 관계가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정황을 바탕으로, '글로벌화'라는 말을 사용해야 마땅할 것이다. 글로벌화의 초기 역사가 단순히 제국들의 팽창과 관련해서만 진행된 것은 아니다. 글로벌화는 또한 세계 경제의 출현 및 성장과 관련해 진행되기도 했다. 그 시기 이후로 세계 시장의 진화와 그것이 각 나라와 사회에 미치는 충격은 이 지구라는 행성을 가로지르는 관계 형성을 이뤄내는 주요 요인 중 하나였다.     

1. “글로벌화” : 용어의 탐색 

1990년대에 이르러 글로벌화는 한층 넓은 공적 영역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글로벌화'의 의미와 관련해 제기된 대다수 정의에서 주요 역할을 한 요소를 갈무리해보면, 세계적 범위로 연결되는 관계의 팽창과 집중화 그리고 가속화를 들 수 있다. 광범위하게 펼쳐지는 의견의 스펙트럼 양쪽 끝에는 글로벌화 경향에 열광하는 자들과 반대자들이 제각각 고수하는 입장이 놓여 있다. 전자가 글로벌화를 성장과 번영의 새 시대의 시작이라고 환영하는 반면, 후자는 그것을 서구에서 기원한 거대 기업에 의해 글로벌 범위로 행사되는 지배 체계의 출현이나 민주주의·노동권·빈곤국·글로벌 생태계 따위의 훼손을 의미한다고 이해한다. 그래서 민족-국가의 대외적인 자주권과 국내적인 권력의 독점 및 통치 능력 등의 침식 문제가 오늘날 사회과학의 중심 주제 중 하나가 되었다. 글로벌화 이를테면 '문화'라는 항목으로 포괄되는 모든 것에 대한 글로벌화의 영향력에 관한 일반적인 동의 또한 존재한다. 서구 문화 산업의 정보 전달 기술과 세계적 마케팅 등에 의해 추동되는 문화적 글로벌화를 가장 먼저 하나의 동질화 과정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와 대조적인 경향이 곧 나타났는데, 글로벌화에 대항하는 운동과 로컬적인 독특성, 개별성, 정체성 등을 옹호하는 새로운 계기를 제공하는 운동의 출현이 그런 대조적인 경향을 분명히 밝혀준다. 


롤런드 로버트슨은 이런 동질화와 이질화의 동시 발생 현상을 "지방주의의 보편화와 보편주의의 지방화"라는 동반 과정이라고 해석했다. 글로벌적 경향이 언제나 로컬적인 공동체에 충격을 주는 동시에 구체적인 상황에 맞춘 특별한 '흡수통합'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그는 '글로컬화(glocalization)'라는 용어를 도입한다. 또한 글로벌화를 통해 일어나는 문화적 변화의 결과는 종종 '혼종성(hybridity)'으로 해석되며, 이는 새로운 문화적 요소가 기존 문화의 요소와 섞이기 위해 창조적으로 적응한 결과를 뜻한다. 사람·상품 그리고 특히 정보가 엄청난 거리를 극복하는 이동 가능한 측면의 용이성과 빈도에 착안함으로써 글로벌화를 시간과 공간의 범주에서 나타나는 하나의 근본적 변화라고 설명해왔다. "시간과 공간의 압축"은 접근이 용이한 직접적 소통의 관계성과 아울러 일종의 '가상' 연대성을 창출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이런 압축 효과는 서로에 대한 접근을 가능케 하는 유효 거리가 지리적 거리보다 훨씬 더 가까워짐으로써 생겨나는 세계적 범위의 사회적 관계, 네트워크, 체계 따위를 위한 필요조건을 제공한다. 


마틴 앨브로의 '글로벌 통합성'이란 개념은 현재를 역사상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한 시대로 설명한다. 글로벌 통합성의 차원은 글로벌 생태계라는 틀 안에 환경 문제가 존재한다는 사실, 글로벌 범위로 일어날 수 있는 파괴적 참화의 상존하는 위험이 대량 살상 무기에서 연유한다는 사실, 정보 전달 체계와 시장이 지구 전역에 걸쳐 전개된다는 사실, 그리하여 결국 글로벌 통합성은 점점 더 많은 사람이 글로벌 맥락에서 일어나고 있는 자신들의 활동과 태도에 관한 지식을 참조해 성찰하는 입장을 취하게 된다는 사실 등을 반영한다고 앨브로는 주장한다. 


마누엘 카스텔은 글로벌화를 '네트워크 사회'의 출현으로 설명하는데, 그가 주장하는 사회 형태 역시 역사적으로 전례가 없는 것이다. 컴퓨터 기술은 최초로 영토 독립적으로 유연한 사회관계의 조직을 가능케 만들었다. 정보화 시대라는 환경에서, 경제와 정치는 더 이상 위계적이며 관료적인 대규모 방식으로 조직되는 것이 아니라 느슨하게 수평적인 네트워크로 구조화된다. 권력을 행사하고 자원을 배분하는 기반이 그렇게 변화해온 것이다. 여기서 권력은 더 이상 명령과 복종으로 확인되지 않으며, 어떤 구체적인 목적을 위해 각각의 시간을 설정하는 가운데 실제로 존재하는 네트워크 조직에 그 닻을 내린다. 억압과 착취로 구축된 이항 대립, '상층'과 '하층'이라는 사회적 범주 그리고 '중심'과 '주변' 같은 지금까지의 지리적 개념 대신, 권력의 결정적 원리는 해당 네트워크에 누가 귀속하는가 혹은 배제되는가의 문제로 구성된다. 그래서 카스텔이 정의하는 새로운 세계에서 주요한 단층선은 연결된 사람과 연결되지 않은 사람으로 나우어진다. 


2. 글로벌화의 차원 

글로벌화가 단지 최근 수십 년 만에 생겨난 일이고, 더욱이 새로운 역사적 시대의 시작을 표상할 수 있는 용어라고 한다면, 그 이전에 존재했던 것들과 다르게 새로 나타난 국면을 먼저 상호 비교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만약 글로벌화가 장기간에 걸친 과정의 상호 작용과 상호 강화를 통해 진행되고 있는 결과적 현상이라고 한다면, 현재의 우리 자신이 바로 역사적 분석을 요구하는 중요한 문제 한복판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제국주의'가 일반적으로 근대 거대 강국의 팽창주의 정책을 지칭하기 위해 쓰이는 용어라면, '제국'은 체계화한 국가 의식의 시작부터 현시대에 이르기까지 지배와 관련한 광범위한 구조를 뜻한다. 


1500년 전후의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식민 제국 출현과 더불어 진행된 하나의 새로운 글로벌화하는 주도적 흐름을 기본적으로 세계적 통합이라는 불가역적인 과정의 시작이라고 해석하는 부분까지는 월러스틴의 의견과 일치하는 견해를 갖는다. 탐험과 정규적인 무역 관계가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아메리카의 직접적인 접촉을 역사상 처음으로 가능케 만들었다. 1750년대 중반까지는 이와 같은 접촉이 다자간에 일정하게 맺은 안정적인 상호 의존성에서 성장해왔다. 그러므로 18세기 중반까지는 최소한 경제적으로 안정적이고 영향력을 갖춘 대륙 간 네트워크가 수립되었다. 다음 시기, 즉 1750년 무렵부터 1880년까지는 그 강도에 있어 전례가 없던 통합의 확장이 산업 혁명으로 창출된 생산과 운송 및 정보 전달 전달 분야의 새로운 기술적 역량에 영향을 받아 세계적 범위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정치적 국면으로 볼 때, 이 시기의 유럽은 자기 대륙 내부로 물러서는 양상을 나타낸다. '세계 경제의 출현'은 널리 퍼져 있던 자유무역이라는 조건 아래에서 일어난다. 이와 동시에 민족-국가라는 형태를 포함하는 유럽식 제도와 유럽의 혹은 '서구의' 사상이 세계 전역으로 수출된다. 우리는 특정한 경제적 영역이 진정한 글로벌 상호 의존성에 의해 최초로 영향을 받는 시기를 1860년대와 1870년로 보는데, 그중 몇몇은 통계적으로도 증명할 수 있다. 1880년 이후의 글로벌화는 정치화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 이르러 국가 형식을 갖춘 사회가 글로벌 경제 통합의 효과에 통제력을 발휘하길 원한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글로벌 경제는 국가 권력의 한 기능으로서 세계 정칠 간주된다. 곧이어서 '세계 강국' 사이의 갈등이 일어나기 시작하는데, 이런 대립과 갈등은 경제적 탈글로벌화 및 글로벌 위기와 세계 전쟁이 만연하는 한 시대의 전조를 보여준다. 1945년 이후 이 시대가 끝나면서, 경쟁적인 두 강국의 권역에서 시행되는 두 가지 경쟁적 모델에 따라 더 나은 세계 질서를 수립하기 위한 신중한 시도가 이뤄진다. 이런 조정을 거치면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특히 탈식민지화, 다국적 기업, 해외 원조 정책, 소비자 사회 등을 통해-글로벌화를 발전시킨 구조가 수립된 것이다. 1989~1991년까지 진행된 소비에트 권역의 붕괴는 완전히 전례가 없는 세계의 급작스러운 출현을 의미하지 않고, 그 붕괴 자체는 오히려 대체로 1970년대에 관측된 각 글로벌화 추진 세력 사이의 경쟁이 낳은 결과라는 것이다.       


3. 1750년까지 세계적 규모의 연계 수립과 발전 

이매뉴얼 월러스틴이 처음으로 하나의 '근대 세계 체제'가 16세기에 출현했다는 역사 이론의 밑그림을 그린 후, 곧 유사한 세계 체제가 훨씬 더 이른 시기에 존재했다는 거의 불가피한 반론이 제기되었다. 몇몇 저자에 따르면, 그런 체제는 역사를 5,000년 정도 이전으로 멀리 거슬러 올라가는 시기에 나타났다. 이런 비평을 추동하는 원동력 중 하나에든 월러스틴이 품고 있으리라고 추정된 '유럽중심주의'를 근거로 그를 불신하려는 정치적 목적도 있다. 


4. 1750~1880년 : 제국주의, 산업화 그리고 자유 무역 

글로벌화의 역사라는 견지에서 특히 흥미로운 점은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국면이다. 첫째, 산업 혁명은 영국에서 시작됐다는 점이다. 둘째, 영국 북구에 번성했던 면화 공업 같은 선도적 경제 분야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것처럼 산업 혁명은 자기 봉쇄적인 경제 체제 안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셋째, 오로지 하나의 산업 혁명만이 존재했던 까닭에 그 여파로 국가적인, 지역적인, 혹은 국제적인 작동의 틀 안에서 수많은 산업화 과정이 뒤따랐다. 넷째, 산업적 생산 수단이 영국적 모형을 모방하는 식으로 단순하게 확산된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 확산을 단순한 과정이 아니라 일종의 '창조적 적용의 복잡한 과정'이라는 측면에서 더 비중 있게 생각해야 한다. 다섯째, 산업적 생산 수단이 해당 경제의 압도적 지위를 차지하고 그에 부수된 현상이 사회 안에서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16세기 이래로, 특히 플랜테이션 대농장 체제와 아시아 교역 같은 대륙 간 구조 안에서 경제 서장, 달리 표현하면, '자본 축적'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렇다면 19세기에 나타난 진정 새로운 면노란 무엇일까? 첫째, 어느 누구도 세계의 어떤 낯선 지역에 이주한 사람들만큼 더 강렬하게 글로벌화를 경험하지 못했다. 이런 이민자들은 대개 자기 조국과의 연결을 유지했기 때문에 19세기의 원격지 이민은 대양을 가로지르는 친족 연계 네트워크 만들기를 통해 지구를 뒤덮었다. 이주자들은 또한 글로벌 통합에 경제적으로 공헌했다. 둘째, 1800년부터 1913년까지 세계 무역은 양적으로 25배 증가했다. 셋째, 역사상 최초로 상품의 장거리 대량 수송이 가능해졌다. 넷째, 글로벌 범위에서 더욱 밀접하게 형성된 연계와 관련한 가장 확실한 지표는 전체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경제적 순환의 출현이었다. 19세기 후반 무렵에 이르러서는 지구상의 거의 모든 곳이 글로벌 규모의 경제적 순환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5. 1880~1945년 : 글로벌 자본주의와 글로벌 위기 

하나의 다자간 체계로서 더 이상 작은 단위로 쪼갤 수 없는 세기 전환기의 글로벌 경제를 설명하는 방식이 그중 하나라면, 다른 하나는 글로벌 규모의 경제 통합이 사회적 상황과 지리적 위치에 의존하면서도 저마다 아주 상이하게 산출해내는 형식과 영향을 강조하는 방식이다. 만약 전자를 가정한다면, 글로벌 경제를 하나의 동질적이고 복합적인 실체로서 인식해야 하는데, 그런 생각은 글로벌 경제가 농업 위주의 주변부와 산업 위주의 서구 중심축 사이의 유기적 노동 분화로 구성되어 있다는 일반적 관념과는 공통점이 거의 없다. 어쨌든 이 시기에 대해서는 세 가지 논점을 기억하는 것이 주요하다. 첫째 논점은 대륙 상호 간 노동·자본 그리고 재화의 흐름이 서로 연계되어 있으며 서로 동등하게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다. 둘째 논점은 1870년부터 1914년까지 런더늘 중심으로 대부분 상호 연계를 이루면서 느슨하게 형성해온 무역 네트워크가 하나의 통일적인 체계로 강화되었다는 사실이다. 셋째 논점은 민족-국가들이 갖고 있는 주도권에 의존하는 체계적으로 발전된 하부 구조 덕분에 오로지 하나의 통일성 있는 체계로서 글로벌 경제가 기능할 수 있다는 점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14년 이전 시기를 '아름다운 시절'이라고 회고하면서 당시의 글로벌 경제를 재건하기 위한 시도가 생겨났다. 하지만 그 시기의 다국적인 상호 의존과 글로벌 경제 차원의 노동 분업은 전쟁에 의해 아주 영구적으로 손상되어 도무지 재생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 재건을 시도하던 중 몇몇 구조적인 문제가 대두되었다. 첫째, 유럽의 모든 참전국은 전쟁 비용과 재건을 둘러싼 재정적 부담을 안았고, 독일의 경우에는 전쟁 배상으로 인해 막대한 빚더미에 짓눌리고 있었다. 둘째, 세계 전역의 시장은 헤어날 수 없는 수요 침체로 고통 받고 있었으며, 글로벌 차원의 무역은 19세기의 상황 덕분에 생긴 경기 호전 속의 생산 활동보다 훨씬 더 천천히 성장했다. 셋째, 전쟁 기간 동안 세계 전역의 정부 당국은 생산, 가격, 통화에 대한 사실상의 통제권을 접수했다. 따라서 국가는 자국 국민의 복지와 경제 성장 그리고 사회적 안녕에 직접적인 책임을 지게 되었다. 넷째, 금본위제는 19세기 세계 경제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동시에 그것을 보증하는 제도라고 여겨졌다. 그런데 전쟁 기간 동안 금본위제를 지키는 불문율이 파기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은 미국을 전후 시기 동안 진행된 글로벌화 과정에서 경제저, 정치적 그리고 문화적 경향을 선도하는 주도자로 변신시켰다. 이런 측면에서 전쟁의 영향을 세 가지 층위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1941년 전쟁에 참전한 이래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지도하는 미국은 유일한 세계 강국으로서 자국의 지위를 인식하고 있었다. 또한 나름의 국가적 이해관계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세계 질서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발언권을 갖는 것이 필수적이고, 전략적으로 혹은 경제적으로 중요한 지역이 적대 국가의 지배 아래 들어가는 상황을 더 이상 내버려둘 수 없다는 인식도 하게 되었다. 둘째, 전쟁이 대단히 이데올로기적이며 인종적으로 덧칠된 다툼이었다는 점이다. 양 진영이 내세우는 정치적 프로그램은 국가적 경계를 초월하는 지지와 충성을 동원하기 위해 활용되었다. 전쟁을 위한 이합집산이 국경을 흐리게 만들기는 했지만, 하나의 새로운 초국적 질서를 향한 길을 창조해내지는 못했다. 오로지 미국이 앞장서 제시한 전승 동맹국의 프로그램만이 사회, 경제 그리고 국제 관계의 광범위한 재건을 통해 글로벌 통합을 제도화하고자하는 목표를 추구할 수 있었다. 셋째, 모든 동맹 세력에게 필요한 전쟁 물자와 수송 물자를 생산할 수 있었던 미국의 산업 능력은 동맹국을 승리로 이끈 결정적인 역량이었다. 군사적 공격에 의한 직접적인 위협이 없었기 때문에 미국의 산업은 표준화한 대량 생산의 체계적인 발전을 이루어가는 데 한 발짝 더 중대한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었다. 


6. 1945~1970년대 중반 : 둘로 갈라진 글로벌화 

다자간 협의주의와 유럽 통합은 특히 민족-국가의 권력을 제한하는 과정으로 설명되었으며, 실제로 통합 유럽이라는 이상을 가졌던 선구자 중 다수는 이렇게 다양한 나라의 결합이라는 자신들의 목표를 '유럽국가연합'이란 형태로 구상했다. 그렇지만 유럽의 통일은 또 다른 한편, 유럽의 민족-국가들이 각자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는 프로젝트이기도 했다. 사실상 유럽적 구조라는 하나의 작동 틀 안에서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협력은 민족-국가 모델을 지속시키기 위해 필연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숙한 국면'에 이른 새로운 유럽이라는 조건에서 민족-국가라는 형태는 폭넓은 합의를 토대로 했다. 첫째, 가장 순수한 이론적 형식으로서 경제적 자유주의는 대공황에 의해 불신을 받았고, 공격적인 민족주의 야망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결국 파탄 났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둘째, '서구'는 이른바 '소비에트 제국'에 의해 제기된 위협을 격퇴하기 위한 노력에 동참해야만 했다. 이는 유럽의 민족-국가들에게 국내의 사회적 안정과 국제적 통합이라는 요구를 숙고하게끔 하는 논의의 장을 마련해주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경제적 계획은 정치적 기획이 그랬던 것보다 훨씬 더 일찍이 실패를 맞이했다. 글로벌 차원의 좌절에도 불구하고 북아메리카, 서부 유럽, 일본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를 묶어서 의미하는 '서구' 안에서 경제적 다자간 협의를 제도화한 새로운 지역이 부상했다. 이와 같은 전개는 네 가지 상이한 측면에서 흥미롭게 관찰할 수 있다. 첫째, 전쟁으로 인해 유럽 경제가 파괴되고 미국이 최강국 위치를 장악한 까닭에, 글로벌 차원에서 진행되던 노동의 분업이 그 자체의 새로운 동력으로 진화하지 못했다. 둘째, 비록 브레턴 우즈 회의에서 수립한 제도가 계획된 방식으로 진정하게 작동한 적이 한 번도 없지만, 그 제도의 기반이 된 원칙은 경제 정책 수립을 위한 준거점으로 남았고, '서구'에서 점점 더 활기를 띠어가는 경제적 상호 거래를 위한 추진력을 제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원칙은 전면적으로가 아니라 오로지 점차적으로만 적용되었다. 셋째, 냉전은 서구 여러 나라의 정치 엘리트로 하여금 자신들을 다자간에 상호 의존적인 존재로 생각하게끔 만들었다. 넷째, 단순한 재건이 전례 없는 급속 고성장으로 이어진 시대에 만연했던 전반적으로 낙관적인 풍토도 중요하다. 


7. 결론


첫째, 1970년대 이래 국제 정치에서 가장 중요하게 전개된 사건은 소련과 소비에트 권역의 부식 및 사실상의 붕괴였다. 소비에트 권역이 해체되자 냉전에 의해 수립된 글로벌 범위의 권력 구조, 즉 국제적인 '양극' 체제 역시 무너졌다. 둘째, 1970년대가 목격한 현실은 또한 완전 고용과 안정적 성장을 확보하기 위해 기획한 복지 국가와 개입주의적 경제 정책이 직면한 위기의 시작이었다. 이런 위기는 흔히 글로벌화의 결과라고 여겨지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글로벌화 과정에서 얻은 새로운 추진력의 중요한 동기이기도 하다. 셋째, 국제 무역과 금융 분야의 급속한 팽창과 극대화가 국제 교류의 자유화를 이끌었다. 넷째, 정보 전달과 정보 처리 기술 분야에서 일어난 발전은 금융 시장이 세계적 호황기를 구가하고, 초국적 기업이 자기들 주도의 글로벌 규모 조직을 설립하고, 또한 '아시아의 호랑이들'이 컴퓨터와 컴퓨터 반도체 산업계의 주요 생산자로 출현할 수 있도록 만든 결정적 요인이었다. 다섯째, 전자 매체는 우리 세계의 상호 연계성을 대중적인 현상으로 만들어내는 동시에 그것을 성찰하도록 권장하는 특히 강력한 촉매로 작용해왔다. 여섯째, 전 세계에 걸쳐 통합이 강화되면서, 합법적인 이동과 함께 마약 거래·돈 세탁·난민 밀입국 그리고 새로운 형태의 노예무역 등과같은 불법적인 이동 또한 가능해지고 또 더욱 용이해지고 있다. 불법적 이동은 종종 중요 연결 지점에서 합법적인 글로벌 경제와 연계되어 있다.  


 

옮긴이의 글 : 다른 세계는 어떻게 가능해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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