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포퓰리즘의 세계화], 존 주디스, 서병훈 해체, 오공훈, 메디치, 2017, (180319).

바람과 술 2018. 3. 19. 10:53

해제 : 포퓰리즘은 '표준적 세계관'이 오작동 한다는 강력한 시그널

존 주디스는 포퓰리즘을 '표준적 세계관'이 고장 났다는 신호라고 규정한다. 지배적 정치 이념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수리가 필요한 응급 상황임을 알려주는 것, 그것이 바로 포퓰리스트들의 존재 이유가 된다. 그러므로 저자는 포퓰리즘의 무게를 소홀히 여길 수 없다. 그는 포퓰리즘이 정치 변화의 기폭제가 될 가능성에 주목한다. 


서문 : 포퓰리즘이란 무엇이며, 왜 중요한가?

좌익 포퓰리즘은 두 가지 요소(국민과 엘리트)로 이루어져 있다. 반면 우익 포퓰리즘은 세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즉, 이들의 시선은 위(엘리트)를 향하는 동시에, 시선을 낮춰 외집단(규범·가치·습관·태도 등이 자신과 공통성이 없는 타인들로 이루어진 집단)을 응시하기도 한다. 좌익 포퓰리즘은 역사적으로 사회주의 운동이나 사회민주주의 운동과는 다르다. 좌익 포퓰리즘은 계급투쟁의 정치도 아니고, 반드시 자본주의 폐지를 추구하지도 않는다. 또한 적대적 계급과 집단의 이익을 조정하고 중재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진보 또는 자유주의 정치와도 다르다. 좌익 포퓰리즘은 국민과 엘리트 간의 기본적인 적대감을 정치의 핵심으로 상정한다. 다른 한편으로 우익 포퓰리즘도 보수주의와는 다른데, 여기서 보수주의란 주로 자신들을 비판하는 사람과 하류층 적대자에 맞서는 사업가 계급과 동일시된다. 또한 미국과 서유럽에 등장한 우익 포퓰리즘의 경우, 민주주의 전복을 목표로 삼는 권위주의적 보수주의와도 다르다. 어디까지나 우익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의 맥락 안에서 작동한다. 포퓰리즘을 정의하는 공통된 관념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국민'으로 이루어진 단일한 지지층도 존재하지 않는다. 갈등 자체는 포퓰리스트들이 엘리트에게 제시하는 일련의 요구에 달려 있다. 


포퓰리스트 운동과 정당의 두 번째 중요한 특징은, 그 운동과 정당이 종종 정치 위기의 적신호로 기능한다는 점이다. 이 특별한 상황이란 바로 국민이 지배적인 정치 규범(국가를 이끄는 지도층이 제안하고 보존하고 옹호하는 규범)과 자신들의 희망, 두려움, 관심사가 서로 충돌한다고 여기는 시기다. 포퓰리스트는 이런 방치된 관심사를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이 관심사를 정치라는 틀 안에 넣어 국민이 비타협적인 엘리트에 대항하도록 만든다. 그렇게 함으로써 포퓰리스트는 정치 변화의 기폭제가 된다. 


1장 미국 포퓰리즘의 논리 : 인민당에서 조지 월리스까지

포퓰리즘은 미국인이 창조해내 나중에는 라틴아메리카와 유럽으로 전파된 산물이다. 미국 포퓰리즘의 가닥은 미국독립혁명과 앤드루 잭슨 대통령이 미합중국 제2 은행 폐지를 두고 벌인 전쟁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실제로는 1890년대 인민당으로부터 시작되는데, 인민당은 주기적으로 튀어나오는 포퓰리즘 운동의 선례를 만들었다. 


미국 정치의 역사는 노예제도, 금주법, 신탁법, 관세, 낙태, 외국에 대한 내정 간섭 등을 둘러싼 갈등으로 분열되어 있다. 하지만 동시에 경제와 해외에서의 정부 역할에 대한 근본적인 합의가 오랫동안 미국 정치사를 지배하고 있다. 근본적인 세계관은 미국과 유럽의 정치적 특징뿐만 아니라, 무력과 공포보다는 주로 합의에 의해 통치되는 모든 국가의 특징을 드러내주는 역할을 한다. 


유권자는 주요 정당이 대단치 않게 여기거나 아예 무시한 사안을 들춰내는 정치인이나 운동에 갑자기 신속한 반응을 보이게 된다. 이런 사건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첫 번째 사건은 정치학자들이 '재정렬 선거'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런 사건이 일어나는 경우, 지배적인 세계관에 도전하는 정당이나 대선 후보는 기존의 연합 관계를 재정비하고 새로운 다수당의 탄생으로 이끄는 대변동을 일으킨다. 두 번째 사건으로 정치에서 이런 정치적 격동은 종종 포퓰리스트 후보와 운동이라는 형태를 취한다. 이와 같이 정치적 격동의 촉매 역할을 하는 포퓰리스트들은 정치를 '우리 대 그들'이라는 용어로 정의 내린다. 즉, 국민을 도외시하는 사안과 요구에 기반을 둔 기득권층에 맞서는 국민의 투쟁이라고 규정한다. 


2장 신자유주의와 그 적들 : 페로, 뷰캐넌, 티 파티, 월스트리트 점령

3장 침묵하는 다수와 정치 혁명 : 도널드 트럼프와 버니 샌더스

4장 유럽 포퓰리즘의 발흥

미국 포퓰리스트와 유럽 포퓰리스트의 주된 차이는, 미국 포퓰리스트 정당과 선거운동의 경우 빠르게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반면, 일부 유럽 포퓰리스트 정당의 경우는 수십 년간 지속된다는 점이다. 이런 차이는 주로 유럽이 다당제이고, 많은 유럽 국가에서 비례대표제를 실시하기 때문이다. 


이들 정당이 부상할 수 있었던 가장 직접적인 요인은, 비유럽 이민자와 망명 신청자에 대한 대중의 커지고 있는 반감을, 정당의 정체성과 긴밀하게 연결시켰기 때문이었다. 20세기 후반 20년 동안, 정당들은 기존의 관심사였던 공산주의와 세금에서 벗어나 이민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들 정당이 성공을 거둔 이유는 단지 이민자에게 비판적이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들 정당이 한때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소기업의 반세금·반정부 견해가, 이제는 복지나 정부에 관련된 사회민주주의 의제의 일부로 포용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5장 좌익 포퓰리즘의 한계 : 시리자와 포데모스

6장 북유럽 우익 포퓰리즘의 약진

포퓰리스트 정당은 자신들의 요구가 단호하게 거절당하면 타격을 입을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포퓰리스트 정당은 자신들의 핵심 요구가 받아들여졌을 때도 상처를 입을 수 있다. 


결론 : 포퓰리즘의 과거와 미래

'파시즘'이라는 용어는 '포퓰리즘'이라는 용어와 거의 같다. 하지만 포퓰리즘에서 파시스트 운동이나 정당이라고 정확히 규정할 수 있는 특징을 모아서 뽑아내기란 상당히 어렵다. 오늘날의 일부 포퓰리스트 선거운동과 제1차~제2차 세계대전 사이에 등장한 일부 파시스트 간에는 몇 가지 확실한 유사점이 있다. 즉, 카리스마가 있는 지도자 역할(트럼프, 르펜, 빌더르스, 그릴로), 민주주의 규범 무시(트럼프), 외집단을 희생양으로 삼기(트럼프, 르펜, 영국독립당의 패라지, 덴마크 국민당) 등에서 유사점이 있다. 하지만 오늘날 미국 및 서유럽의 포퓰리즘과 제1차~제2차 세계대전 사이에 등장한 파시스트 운동 간에는 두 가지 중요한 역사적 차이가 있다. 첫 번째 차이는, 이탈리아와 독일의 원조 파시스트 정당은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뒤에 생겼다는 점이다. 파시스트와 나치가 원래 겨냥했던 대상은 자국에서 활동하는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였다. 그들의 목적은 단순히 선거에서 사회당과 공산당을 패배시키는 것이 아니라, 무장 투쟁을 통해 완전히 파괴시켜버리는 것이었다. 반면 오늘날 서유럽에서 일어난 포퓰리스트 운동은 민주주의 선거 제도 안에서 공개적으로 전개된다. 포퓰리스트 정당도 보편적인 정당과 마찬가지로 선거를 통해 권력을 얻거나 잃는다. 국민전선처럼 파시즘에 뿌리를 두고 있는 포퓰리스트 정당은 자신들의 뿌리를 부인한다(동유럽과 그리스에는 유럽의 어두운 과거로부터 거리를 두지 못하는 우익 정당이 아직 존재한다). 이와 동시에, 일부 포퓰리스트 정당에는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가 있다. 하지만 이들 정당은 나치가 그랬던 것처럼 그 지도자에게 거창하게 국가의 의지를 부여하려 하지않고, 단지 선거로 지도자를 선출하려고 노력한다. 두 번째 차이는, 원조 파시스트 운동은 혁명적 변화에 대응해 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1870년대에 시작된 제국주의 지배에 대한 지속적인 투쟁의 일환으로 발생했다는 점이다. 파시즘은 본질적으로 팽창주의의 특성을 지녔다. 이에 비해 유럽에서 등장한 우익 포퓰리스트 운동은 국가를 뛰어넘는 제국 형성을 반대한다. 그 대신 이 우익 포퓰리스트 운동은 자국 통화, 재정 정책, 국경에 대한 국가 통제를 분명히 해주기를 원한다. 실제로 이 우익 포퓰리스트 운동은 제국주의나 세계주의와는 '정반대'인 국가주의적 성격이 짙다. 우익 포퓰리스트 정당과 그들의 선거운동을 '파시스트'라고 부르면, 물론 정치적으로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용어가 우익 포퓰리스트 운동에 대한 가장 치명적인 약점을 드러내주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파시스트라는 용어는 현대사에서 우익 포퓰리스트 정당과 운동의 실제 역할을 이해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들 정당과 운동을 파시스트라고 부르는 것은 이들이 일으키는 위험을 과정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전쟁을 벌이거나 의회를 해산하라고 협박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런 정당과 운동이 혐오감을 준다면, 이는 그들이 공언하는 '일종의' 배타적 민족주의 때문이지 글로벌한 야망 때문은 아니다.   


감사의 말

참고 도서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