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메타정치론], 알랭 바디우, 김병욱, 이학사, 2018, (181102).

바람과 술 2018. 11. 2. 08:40

'메타정치론'이란 실제 정치가 사유라는 사실로부터 철학이 그 자체로 그리고 그 자체를 위해 도출할 수 있는 결과를 뜻한다. 메타정치론은 정치는 사유가 아니며, 정치적인 '것'을 사유하는 일은 철학자의 소관이라고 주장하는 정치철학에 반대한다. 


프롤로그. 저항하는 철학자들 … 9 


'모든 사람'이 페탱주의자일 때는 페탱주의자가 되고, 그리고 그런 식으로 다른 많은 것이 되면서 자신의 길을 추구하는 것이 시류의 호응을 얻거나 타산에 맞기만 하다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스피노자의 가르침에 따라 카바예스는 인식을 탈주관화하고자 했기에 또한 레지스탕스 투쟁을 불가피한 필연성으로, 즉 자기에 대한 고려로도 속일 수 없는필연성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1943년에 그는 이렇게 선언했다. "나는 스피노자주의자다. 나는 우리가 도처에서 필연적인 것을 포착한다고 생각한다. 수학자들의 추론적 맥락도 필연적이요. 수학의 단계들도 필연적이며, 우리가 하고 있는 이 투쟁도 필연적이다." 스피노자가 말했듯이 "자유로운 인간은 전혀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며, 그의 지혜는 죽음이 아니라 삶에 대한 명상"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캉길렘은 이렇게 결론짓는다. "카바예스는 논리에 따라 저항했다." 이 "논리에 따라"라는 말 속에 들어 있는 것이 바로 철학적 엄밀함과 정치적 규정의 연관이다. 


"논리에 따라' 저항하는 자는 어떤 공리, 혹은 어떤 명령을 따르며, 이를 자기 자신의 이름으로 표명하며,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객관적인 집단의 용어로 거기에 연대하기를 기다리는 일 없이 자산이 그 최초의 결과들을 펼쳐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논리에 따라 이루어지는 저항은 의견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지배적으로 통용되는 의견과는 논리적 단절이다.


모든 저항은 존재하는 것과의 단절이다. 그리고 모든 단절은 저항에 참여하는 자에게 있어 자기 자신과의 단절로 시작된다. 저항하지 않는 것, 그것은 사유하지 않는 것이다. 사유하지 않는 것, 그것은 위험 감수를 감수하지 않는 것이다. 스피노자가 말한 것처럼 "오직 자유로운 인간들만이 서로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다."     


1. "정치철학"에 반대하여 … 21 

정치철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정치를-더 나아가 정치적인 것을-보편적 경험의 객관적인, 심지어 불변하는 데이터로 간주하고, 그것에 대한 사유를 철학의 영역으로 인도하려는 계획이다. 그렇게 되면 정치적인 것에 대한 분석을 산출하고, 결국 그 분석을 윤리의 규범에 종속시키는 일이 철학의 소관이 될 것이다. 그러면 철학자는 삼중의 혜택을 보게 된다. 첫째는, 현실 정치의 경험성이라는 그 혼란스럽고 적나라한 객관성에 대한 분석가이자 사상가가 되는 혜택이다. 둘째는, 좋은 정치, 말하자면 윤리의 요구에 부합하는 정치의 원칙들을 결정하는 자가 되는 혜택이다. 셋째는, 이를 위해 어떤 진짜 정치적 과정을 수행하는 투자가 되어야 할 필요가 없으며, 따라서 그에게 가장 소중한 양태, 즉 판단의 양탸로 현실에 대한 훈계를 무한히 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치'는 (모든 사유가 그 철학적 정체성 확인이 차원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진리라는 테마와 연결된다는 데 동의한다면) 어떤 사유의 이름도 아니고 어던 행동의 이름도 아니다. '정치'가 여론을 그 자체를 위한 유일한 정당성의 장소로 여기는 순간, 진리라는 테마가 거기에서 배제되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는 저마다 소중한 '의견의 자유'가 있다는 것은 알지만, '진리의 자유'가 있는지는 의심한다. 


정치는 이것-어떤 대상이 아니라 어떤 나타남 어떤 일어남-은 나의 마음에 든다거나 혹은 나의 마음에 들거나 들지 않는다고 언명하는 공적 판단을 통해 유발된다. 그리고 정치는 그런 판단들에 대한 토론을 통해 실행된다. 바로 이것이 정치를 결정적으로 여론의 복수성에, 즉 의회주의가 여러 복수 정당을 수단으로 정치를 수단으로 정치를 국가와 결합시킨다고 알려진 그러한 복수성에 귀착시킨다. '다원주의', 곧 후속되는 정치들이 일반적으로 동일한 것들임을 선전하는 의회주의의 다른 이름은 이로써 어떤 초월적 정당성을 부여받는다. 


복수성 그 자체를, 여러 사람의 같이-있음 혹은 공동으로 있음을 '공동체'라 부르자. 그 복수성과 직접적으로 관계된 판단의 원천을 '공통감'이라 부르자. '공통감'을 통해 우리에게는 사실상 하나의 초월적 규범이 부여되는 셈이다. 왜냐하면 이 경우에 복수성만이 전제될 뿐 아니라, 적어도 법적으로는 그 복수성의 주관적 단일성이 전제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실제로 현대 의회주의 국가들의 지배 이데올로기인 합의 교설에 이르는 길을 연다. 


아렌트와 르보 달론이 말하는 정치는 다음과 같이 정의될 수 있다. 즉 정치는 공동의 것의 공유라는 규범 아래, 악에, 다시 말해 이 공유의 파괴에 저항하는 판단의 이름인 것이다. 우리는 이 토론에 '정치적으로' 초대받았으므로 나는 다섯 가지 이의를 제기하고자 한다. ① 정치적인 것의 '존재론적' 성격을 복수성 혹은 같이-있음에 두는 규정은 분명 너무 광범위하다. 물론 정치는 다수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나 정치는 공동의 것 혹은 '타자'의 권위보다 훨씬 뒤에 단독화되어야 한다. ② 중요한 것은 어떤 공통 규범 아래 있는 의견들의 복수성이 아니라 정치들의 복수성이며, 정치들은 그 각각으로부터 도출되는 주체들이 다르기에 공통 규범을 갖지 않는다는 점이다. ③ 우리는 정치를 합의에 입각한 것으로 보는 모든 견해에 반대한다. 비록 어떤 사건에서 도출되는 진리가 보편적일지라도, 그 사건은 절대 공유되지 않는다. ④ 의견들은 잠재된 어떤 초월적 형상도 가리키지 않는다는 점에서 의견들의 형성과 토론이라는 문제는 고스란히 남아 있다. ⑤ 정치의 본질은 의견들의 복수성이 아니다. 그것은 거기 있는 것과 단절된 가능성의 규정이다.  


2. 사유로서의 정치: 실뱅 라자뤼스의 작품 … 41 

일차적인 의미에서 이름이란 실재 그 자체이며, 그래서 이름에는 정의가 있을 수 없다. 실재는 그 사유를 구성하는 "-의 관계'로서만 식별 가능하므로 언제나 불분명하다. 


3. 알튀세르: 주체 없는 주체성 … 77 

4. 정치의 탈유대 … 89 

5. 민주주의라는 개념에 대한 고도의 사변적 논고 … 103 

국가는 사유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정치에 관한 철학적 사유에서 드러나는 모든 난점의 근원이다. 


6. 진리와 정의 … 125 

우리가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할 것은 불의는 명백하고 정의는 모호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불의를 겪는 사람은 불의에 대한 부인할 수 없는 증인이다. 나의 불의가 감각적인 것, 경험, 주관적인 것 쪽에 있고, 정의는 관념적인 것, 이성, 객관적인 것 쪽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불의는 직접적인 무질서이며 정의는 이에 대한 이상적인 질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7. 랑시에르와 평등한 자들의 공동체 … 139 

평등은 결코 사회적인 것이나 사회적 정의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언표와 규정의 체제에 속하는 것이라는 점에 동의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면에서 평등은 모든 해방 정치의 잠재적 원칙이며 단순히 프롤레타리아 역사의 양피지 위에 남겨진 긁힌 자국이 아니라는 점에 동의해야 한다. 그렇다, 평등의 정치는 있을 수 있고, 지금 여기에 있다. 왜냐하면 중요한 것은 평등의 정치를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정치를 공준하면서 그 귀결의 엄격한 실천을 통해 그 공준을 보편화하기 위한 조건을 창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8. 랑시에르와 비정치 … 147 

9. 테르미도르 당이란 무엇인가? … 159 

10. 진리 절차로서의 정치 … 179 

우리는 모두 정치가 실존할 결우 정치는 곧 국가의 힘의 표출을 야기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정치가 집합적이고, 따라서 상화으이 부분들에 보편적으로 관여하며, 상황 상태의 실존의 장이 된다는 것은 명백하다. 정치는 국가의 힘을 소환하며, 그 힘의 소환을 직접적으로 실행하는 유일한 진리 절차다. 이 소환의 통상적인 외양은 정치가 언제나 억압에 직면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억압은 국가의 방황하는 막강한 힘의 경험적 형식일 뿐 핵심적인 사안이 아니다. 


정치적 사건과 그 사건으로 시작되는 진리 절차의 진정한 특징은 정치적 사건이 방황을 고정시키고, 국가의 막강한 힘의 크기를 정하며, 국가의 힘을 고정시킨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정치적 사건은 국가의 힘의 주체적 방황을 중단시킨다. 경험적으로 이것은 실제로 정치적인 사건이 있을 때 국가가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국가는 그 힘의 초과를 드러내는데, 그것이 바로 억압적 차원이다.  


부록. 이 책을 쓰는 데 사용된 기간행 텍스트들 … 195 

옮긴이의 말 … 1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