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경제학

[게으를 수 있는 권리], 폴 라파르그, 조형준, 새물결, 1997, (210801)

바람과 술 2021. 8. 1. 20:11

역자 서문 : 게으를 수 있는 권리라고?

 

이 책은 처음 출간된 100년 전뿐만 아니라 몇 년 전에도 프랑스에서 대단한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베스트셀러로 기록되었다. "자본주의가 지배하고 있는 나라들의 노동계급은 기이한 환몽에 사로잡혀 있다. 일에 대한 사랑, 일에 대한 격정적인 사랑에 말이다"라고 시작되는 이 소책자는 현대 사회의 노동, 여가, 일상생활의 정치경제학 등에 대한 상투적 사고를 기발하게 역전시킬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준다. 

 

영어판 서문 : 여가를 둘러싼 전쟁

 

자유롭게 여가를 즐기려면 무엇보다 먼저 노동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이와 함께 여가와 노동의 대립관계를 정당화하는 정신적 독재체제를 끝장내야 한다. (베상 부누르와 브라티슬라브 에팡베르제, <초현실주의 문명>)

 

1993년판 저자 서문 

 

게으를 수 있는 권리/폴 라파르그

 

모든 일을 게을리 하세. 사랑하고 한잔 하는 일만 빼고, 그리고 정말 게을리 해야 하는 일만 빼고. - 레싱

 

① 참혹한 결과를 가져온 노동숭배

 

자본주의 문명이 지배하는 국가의 노동자 계급은 기이한 환몽에 사로잡혀 있다. 이러한 망상이 개인과 사회에 온갖 재난을 불러일으켜, 지난 2세기 동안 인류는 크나 큰 고통을 겪어왔다. 다름 아니라 노동에 대한 사랑, 일에 대한 격렬한 열정이 바로 이러한 환상의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으며, 이러한 열정이 어찌나 격렬한지 한 개인뿐만 아니라 후손들의 생명력까지 소진한 지경에 이르렀다.  

 

문명국가의 모든 생산자들을 포용하는 거대한 계급으로서 스스로를 해방시키면서 인류를 고된 노역으로부터 해방시켜 인간을 자유로운 존재로 만들 사명을 부여받은 프롤레타리아 계급. - 이 프롤레타리아마저 본능을 배반하고, 역사적 사명을 무시한 채 노동숭배에 빠져 스스로의 모습을 왜곡시켜 버리고 말았다. 프롤레타리아에게 떨어진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재난은 모두 노동에 대한 열정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② 노동의 축복

 

하루 12시간 노동이 18세기 박애주의자들과 도덕가들의 이상이었다. 우리는 그동안 이 최소 노동시간마저도 얼마나 초과해 일을 해왔던가?

 

우리 시대는 노동의 세기로 불리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고통, 불행, 부패의 세기이다. 


③ 과잉생산의 결과

 

④ 새술은 새 포대에

 

노동자 계급이 자신을 지배하면서 본성까지 타락시키고 있는 악을 뿌리뽑아 버리려면 가공할 만한 힘으로 떨쳐 일어나야 하는데, 단지 자본가들의 착취의 권리만을 의미할 뿐인 '인권선언' 또는 단지 불행할 수 있는 권리만을 의미할 뿐인 '일할 권리'가 아니라 누구든 하루 세 ㅅ시간 이상을 일할 수 없도록 금지하는 철의 법칙을 주조하기 위해 봉기해야 하는 것이다. 

 

고대 노예제도를 슬픈 모습으로 체현하고 있는 그리스도처럼 프로렐타리아의 남편과 아내들 그리고 아이들은 벌써 한 세기 동안 고통스럽게 고난에 가득 찬 갈보리 언덕을 기어오르고 있다. 한 세기 동안이나 강제 노역이 이들의 뻐를 부러뜨리고, 피부를 멍들게하고 신경을 망가뜨렸다. 한 세기 동안이나 굶주림이 이들의 내장과 뇌를 산산조각내 왔다. 오! 게리음이여, 이 오랜 고통에 자비를 베푸소서! 예술과 고귀한 미덕의 어머니인 게으름이여, 이 인간의 고통에 위안이 되어 주소서!

 

부록 

 

오늘날의 자본주의 도덕가들과 경제학자들은 임금노동자, 즉 현대의 노예제를 찬양하지 않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앞을 내다보는 능력이 있었다. 즉 만약 디덜러스의 걸작들이 스스로 움지이듯이 혹은 불칸(아테네의 명장으로 아들 이카루스와 함께 크레타 섬의 미로를 만들었다.)의 삼각가(세발 달린 받침대, 삼발이)들이 저절로 신성한 일을 수행하듯이 모든 도구들이 스스로 제구실을 한다면, 또 예를 들어 직조기의북이 스스로 움직이며 직물을 짠다면 공장이ㅡ 작업장은 더 이상 노예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노예 소유주도 필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꿈은 우리의 현실이 되어야 한다. 불로 숨쉬고, 결코 지치지 않는 철로 된 팔다리를 가진 우리 기계는 쉼없이 경이로운 속도로 온순하게 스스로 신성한 노동을 수행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재적이라 할 수 있는 자본주의의 위대한 철학자들은 노예제도 중 최악이라고 할 수 있는 임금노예제도의 편견에 철저하게 사로잡혀 있다. 이들은 아직도 기계가 바로 인류의 구원자로, 천박한 일과 돈 때문에 하는 노역에서 인류를 구원하고 여가와 자유를 마련해 줄 신이라는 사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폴 라파르그, 일과 여가 : 전기적 에세이/프레드 톰슨

 

① 프랑스의 노동운동과 정치, 1830~1880

 

② 폴 라파르그는 누구인가

 

이들의 장례식에는 많은 동지들이 몰려 왔다. 수많은 조문연설객들 중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한 러시아 망명객도 있었는데, 그는 전에 이들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블라디미르 레닌이 바로 그였다. 

 

③ 노동과 여가에 관해

 

노동자는 노예도 아니고 농노도 아니지만 생계를 유지하려면 다른 사람들의 요구에, 즉 주인의명령에 따라야만 한다. 태어나서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이윤 추구의 기회라고는 전혀 가져볼 수 없는 우리가 애써 겨우 얻어낸 한 뼘의 자유시간마저도 엄청난 이윤을 챙기는 산업의 토대가 되고 만다. 어떤 문화 속에서 살고 있건 모든 젊은이들은 여가를 적절하게 이용하는 방법을 배우게 되어 있는데, 미국의 젊은이들은 이를 위해 돈을 내거나 사용료를 내야 하는 것이다. 

 

노동시간이 줄어든다고 해서 그만큼 이에 상응하여 여가시간이 늘어난 것은 아니다. 우리의 문화체제는 우리 스스로 우리를 착취할 고용주를 찾아 다니고, 우리를 지배할 정치가를 선출하여 이들이 마음대로 조직하는 삶의 양식을 자유라고 느끼며 살아가도록 만든다. 

 

우리에게는 "가만히 멈추어 서서 바라볼 시간"이 필요하며, 무슨 사건에 참여할 때는 어느정도 긴장감도 느껴야 한다. 우리는 혼자 있을 시간이, 타인과 깊숙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시간이, 집단의 일원으로서 창조적인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우리 자신의 일을 몸소 창조적으로 행할 수 있는 시간이, 우리 외부에서 주어지는 즐거움을 주체적으로 즐길 수 있는 시간이,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고 그저 우리의 모든 근육과 감각을 사용할 시간이 필요하다 - 그리고 바라건데, 많은 사람이 동료들과 함께 정말 건전한 세상을 만드는 방법을 기획할 시간이 필요하다. 

 

다가올 미래에는 좋아서 일하고, 무상으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일과 여가는 서로 구분이 안되며 공간적으로도 구별이 안되는 자발적이며, 온갖 종류의 상품 문화의 오염으로부터 해방된 합목적적 활동이 될 것이다.

 

참고문헌  

 

인물과 장소에 관한 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