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찰사 박규수, 평양 사람들과 제너럴셔먼호를 불태운 배경은? / 이헌주
슈펠트 파견을 통해 미국 아시아함대 사령관이 확인하고자 했던 것은 조선 정부가 써프라이즈호의 선원에게는 극진한 호의를 베풀었으면서 제너널셔먼호에 대해서는 유독 적대적 행위를 했는가 하는 점이었다. 제너널셔먼호 사건은 조선 정부의 조난선원 처리 관행을 볼때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었고, 미국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의구심을 품을 수밖에 없는 사건이었다. 제너널셔면호는 무역을 위해 온 상선을 자처하였음에도 화포인 대완구와 소완구를 각각 2문씩 장착하고, 선원들도 모두 조총을 휴대하여 평범한 상선으로 보기에는 지나친 중무장이었던 점도 의문이 아닐 수 없다. 결국 1866년 가을 대동강에 출현했던 제너럴셔먼호는 미국 국적의 선박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무엇 하나 변변히 알려진 것이 없는 정체불명의 배였던 셈이다. 제너럴셔먼호가 조선에서 달성하고자 했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하는 것도 커다란 의문점이다.
제너럴셔먼호 사건은 한탕주의에 젖은 약탈적 무역 상인들이 중무장한 채 대동강에 나타나 통상을 유교하며 행패를 부리다가 분노한 평양 군민들에 의해 섬멸된 우발적인 사건이었따. 미국 정부는 슈펠트의 보고서를 통해 제너럴셔먼호 사건의 이러한 성격을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애써 외면하였다. 조선의 문호를 열러 무역을 확대시키려는 정책 목표를 가졌던 미국 정부는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킬 좋은 기회로 여겼기 때문이다.
병인박해 때 양반 출신 천주교 신자들의 처절한 순교 모습! / 서종태
제천의 의병 유인석, 항일의 횃불을 치켜들다! / 박경자
수천 년간 키워온 조선 선비의 유형을 사육신과 생육신형으로 나눈다면, 의병은 사육신의 전통을 계승함이요, 생육신의 전통은 자정론으로 이어졌다고 하겠다.
지방 양반 자제들의 서원 교육은 어떻게 이루어졌나? / 윤희면
온갖 정성 끝에 양반의 자손으로 태어났다면 그는 사회적으로 혜택을 받은 사람답게 의무가 있었다. 바로 수기치인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의무였다. 수기란 도덕적으로 완성된 인간을 말한다. 공자의 가르침에서 중요시 하는 인, 맹자가 강조한 의를 갖추어 이상적인 인간인 군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 바로 수기이다. 이런 도덕적 완성은 자신에게만 그쳐서는 안 되고, 이를 바탕으로 다른 사람을 이끌어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어 나가야 할 사회적 의무가 있었다. 이것이 치인 또는 악인이라 하는 것으로, 바로 관료가 되는 일이었다.
조선조 500년 동안 문과 합격자가 14,600명 이고, 이들의 평균 나이는 30대 후반이라고 한다. 어린 나이에 시작해서 거의 30여 년 동안을 공부한 셈이고, 어려운 경제적·교육적 경쟁 속에서 겨우 살아남았다는 말이다.
향교는 관학으로 한 고을에 하나씩 세워져서 지방 사람들의 공부장소로 활용되었는데, 수준은 오늘날의 중·고등학교 정도로 볼 수 있다. 늦어도 성종대에 이르러서는 전국의 모든 군현에 향교가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고을이 약 330개 되므로 향교로 그 수만큼 되며, 중간에 고을이 없어지거나 하면 향교도 없어지게 되었고, 새로 고을이 만들어지면 향교도 함께 건립하였다. 향교는 제례와 교육의 2대 기능을 가지고 있다.
고을에는 향교와 관련 있는 반관학의 성격을 지닌 학교시설로 사마재(사마소)와 양사재라는 것이 잇었다. 사마재란 지방의 성균관이라 할 수 있으며, 양사재는 향교의 교육기능을 대신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마란 생원, 진사를 가리키는 말이다. 생원, 진사에 합격하면 서울에 있는 성균관에 입학하여 문과시험을 준비하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하여 자기 고을로 내려온 생원, 진사들의 교육장소로 마련된 것이 사마재였다. 향교에 적을 두기에는 이들의 격이 너무 높고 해서 따로 공부장소를 마련한 것이었다. 그러나 사마재는 서원의 등장, 발달과 함께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양사재는 지역에 따라 흥학재나 육영재 등의 이름을 지니기도 했는데, 조선 전기에는 없다가 후기에는 거의 모든 군현에서 서립되고 있던 학교였다. 양사재는 교육기능의 회복이 어렵다고 본 향교를 대신하여 인재를 양성하고 유생들의 과거 준비를 위하여 향교 근처에 설립하는데, 수령과 고을 양반이 힘을 합쳐 설립하고 운영하였다.
고을에 있는 사학으로는 서재, 정사, 서원 등이 있는데, 서재와 정사는 자기가 공부하기 위해 세우거나 문중 자제를 가르치기 위한 지극히 개인적인 학교시설이었고, 양반 자제들이 모여 공부할 공공성이 큰 학교는 서원이었다. 서원은 서울의성균관에 버금가는 교육기관으로 만들고, 또한 유생들이 과거 공부를 하는 데 전념토록 할 조치로 이해할 수 있다. 서원의 유생이 되면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았다. 또한 아울러 양반들을 절박하게 만든 것은 향교에 적을 둔 양반들에 대한 고강이었다. 학생들이 공부를 열심히 하게 하자는 명분 아래 고강에 떨어지면 군역을 지거나 군포를 내는 등의 군역 확보방법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서원의 유생들은 고강이 면제되었다. 서원 유생 자격을 학행으로 하였다고 해서 서원 유생되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다른 양반들의 추천과 투표를 거쳐야 했다.
원산 상인들, 상회소를 결성한 뒤 학사까지 세웠나? / 조규태
일본인의 진출이 확대되고, 이들의 경제적 침투가 진전되던 1883년 원산상회소가 설립되었다. 부산의 상회소는 1889년에 설립되었고, 인천의 상회소는 1890년경에 설립되었으므로, 원산산회소는 우리나라에서 개항장 중에서 최초로 설립된 상회소였다. 원산상회소의 회원들이 원산학사의 설립에 대거 참여하였고, 또 원산학사가 원산상회소가 설립된 1883년에 설립된 점으로 볼 때, 원산학사의 설립은 원산상회소의 설립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원산학사가 일본을 비롯한 외세의 침략에 대처하기 위한 목적에서 설립되었음은 원산학사의 편제를 통하여도 알 수 있다. 원산학사는 문예반과 아울러 무예반으로 편성되었다. 그런데 문예반은 설립 당시 정원이 50명 정도였다. 이에 반하여 무예반은 정원이 200명이나 되었다.
무관 출신 최경석, 농무목축시험장을 운영한 이유는? / 서진교
여러 지방의 방곡령 사건 : 곡식을 지켜야 우리가 산다! / 하원호
개항기의 조선미의 산출고는 대체로 평년작 1,000만 석 전후로 잡을 수 있다. 이 정도의 생산량으로는 2,000만이 넘던 당시 인구의 쌀 수요를 채우기는 불가능했고, 삼남지방 외의 보통 사람들은 쌀을 구경하기도 힘들었다.
방곡은 행정의 강제력으로 한 고을의 곡물이 다른 지역으로 나가는 것을 막는 일종의 경제정책으로 조선 고유의 용어였다.
잔반 전봉준, 동학도를 이끌고 새로운 세상을 열려 하다 / 노용필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역사에서 도피한 거인들], 루츠 니트 함머, 이동기, 박종철출판사, 2001, (210909) (0) | 2021.09.09 |
|---|---|
| [첨단X유산], 고려대학교 공과대학, 동아시아, 2021, (210907) (0) | 2021.09.07 |
| [개화기 지방 사람들 1 : 왕실/중인/천민], 어진이, 2006, (210813) (0) | 2021.08.13 |
| [1587 만력 15년 아무 일도 없었던 해], 레이 황, 김한식, 새물결, 2004, (210812) (0) | 2021.08.12 |
| [조선시대 살아보기], 반주원, 제3의공간, 2017, (210809) (0) | 2021.08.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