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도발 : 아방가르드의 문화사, 몽마르트에서 사이버 컬처까지], 마크 애론슨, 장석봉, 이후, 2002, (220612)

바람과 술 2022. 6. 12. 22:54

감사의 글

 

들어가는 말

 

예술의 경우, 아방가르드는 미래를 내다보고 자신들의 통찰력을 우리 눈앞에 들이대는 일에 자신의 재능 심지어는 삶까지도 바치는 사람들을 말한다. 아방가르드(또는 전위)라는 군사 용어가 오늘날과 같은 의미를 띠게 된 것은 생-시몽에 의해서다. 생-시몽은 「어느 제네바 주민이 동시대인들에게 보내는 편지」(1803년)에서 "생산자, 과학자, 예술가야말로 사회를 이끌어 가기에 가장 적법한 선구 집단이다"라고 말하며, 아방가르드는 "왕족이나 귀족 같이 '게으른 자들'과는 달리, 인습적인 귄위와 권위와 전통에 맞서고, 사회의 발전을 앞당기는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이런 아방가르드의 용법은 생-시몽의 직계 제자였던 로드리게스에 의해 예술 분야로 확장됐다. 로드리게스는 「예술가, 과학자, 생산자」(1825년)라는 글에서, "우리가 진정한 아방가르드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예술가다"라고 언급하며, 상상력을 통해 미래를 여전하고 미래를 창조할 수 있는 존재로서 사회 발전의 최전선에 서는 인물이라는 예술가 상을 확립했다. 

 

아방가르드가 된다는 것은 끊임없는 반항 상태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끊임없는 반항은 뛰어난 창조성일 수도 있다. 최고의 아방가르드는 우리 시대의 감춰진 생각,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갈망, 이제 막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갈등을 무대 위에, 활자 위에, 그리고 화폭 위에 펼쳐 보인다. 아방가르드는 평범한 일상생활의 표면 아래에서 요동치고 있는 꿈과 악몽 속으로 우리를 밀어 넣는다. 

 

이 책을 읽는 분들에게

 

제1장 뉴욕의 {나체}

 

루즈벨트를 포함해 당시의 대다수 사람들은 예술을 일종의 완벽함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예술가들의 임무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단순히 복제해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더욱 더 높은 수준으로 고양시키는 것이었다. 아름다움의 기준을 확고히 정립함으로써 예술가들은 귀에 거슬리는 일상생활의 소음 더미들을 우아한 이미지로 바꿔 놓았다. 종교적인 관계, 하느님에 대한 생각, 일상적인 가족 생활 속에서 사람들을 인도하는 기독교적 이상은 이런 종류의 예술에 의해 또다른 형식으로 표현됐다. 일상생활, 도덕 규범, 예술 규범, 이 모든 것들이 한 줄로 깔끔하게 늘어서 있었다. 이 새로운 예술은 이런 모든 규범들을 위반했다.  

 

1917년 1월 어느 추운 날 밤, 뒤샹과 존 슬로안(팔인회의 일원이자 완고한 사회주의자)을 포함해, 빌리지 사람 여섯 명의 위싱턴 스퀘어 파크의 입구에 있는 아치 위로 올라갔다. 흔들거리는 등불 속에서 그들은 "그리니치 빌리지의 미합중국 탈퇴"를 선언하는 문건을 작성했다. 빌리지 사람들의 급진적인 생각은 루즈벨트 같은 보수주의자들이 옮았음을 보여줬다. 만약 새로운 예술을 즐기고 있다면, 당신은 자국 내의 소수자들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만약 미국이 기본적으로 유럽 문화를 지닌 백인 기독교도들의 나라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원시적'으로 보이는 이 새로운 예술은 당시 눈에 퇴행으로 비칠 것이다. 즉, 이는 퇴폐의 징조인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만약 인디언 보호 구역, 이주민들의 게토, 아프리카계 미국 흑인들의 음악과 이야기 속에서 미국의 활기차고 흥미진진한 면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기존의 예술을 거부하는 일보다 더 현대적인 것을 없을 것이다. 아머리 전시회로 촉발된 예술에 관한 논쟁은 단순히 예술이나 도덕에 관한 것이 아니라, 미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느냐에 관한 것이었다.   

 

제2장 니진스키, 세상과의 불화

 

제3장 보헤미안, 규칙을 깨다

 

원래 보헤민안이 된다는 것은 불온한 생각을 지니는 것이며, 자신의 이미지, 즉 비주류로 살면서도 자신을 사람들에게 알리려 한다는 이미지를 판다는 것을 뜻했다. 이런 이중성 때문에 보헤미안 예술이 위험해지지 않았다거나 위력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제4장 "내 정신의 무질서"

 

보헤미안들은 이상한 옷차림을 하기도 하고, 자유연애를 추구했고, 정치적으로 극단적인 견해를 지녔다. 이런 행동들은 모두 그들의 예술을 둘러산 채 그들의 명성에 기여했다. 그러나 그들의 예술은 기성화 될 수 있었고, 그들의 삶은 흔히 완벽한 부르주아지가 되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더군다나, 보헤미안적 삶을 사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결코 자신이 예술가가 되고자 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아방가르드들은 이들과 달랐다. 그들은 충격적이 되는 것, 사회에 반대하는 것, 새로운 것에 찬성하고 낡은 것에 반대하며 사는 것 자체가 그들의 예술이었다. 아방가르드는 일종의 현실 참여였던 것이다. 

 

제5장 예술은 죽었다

 

다다는 예술인 동시에 반예술이었다. 다다가 발견한 핵심적인 것들 가운데 하나가 우연이다. 예술은 더 이상 '진지하고 무거운' 감정적인 자극도, 감상적인 비극도 아닌 경험의 과실이자 삶의 즐거움이었다.   

 

제6장 우리 시대의 우상

 

아방가르드는 불온한 것이며,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아방가르드의 목적 우리를 충격에 빠뜨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이미 몸담고 있는 이 충격적인 세상을 억지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아방가르드이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자주 오만했다. 그들은 문명화된 사회의 안전한 집이나 거리가 아니라, 황야로 내딛는 자신들의 발걸음을 신뢰했다. 그래서 이들은 예언자적 통찰력을 되찾을 수 있을 만큼 자유롭게 된 것일까? 아니면 미망을 숭배하고 악몽을 꾸도록 저주받은 것일까? 소비에트 아방가르드는 이처럼 모순적인 이야기들을 모두 헤쳐 나아갔다. 

 

미래주의자들은 기계를 열렬히 옹호했지만, 공산주의에는 조금도 경도되지 않았다.

 

구성주의자들은 기계를 예술의 오브제로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그 본질로 생각하기도 했다. 구성주의자들 가운데 이름난 여성들이 많다는 것은 구성주의가 진보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다는 징표였다.  

 

아방가르드 정치가들은 아방가르드 국가를 세웠는데, 예술가들이 어떻게 반항을 할 수 있겠는가? 이에 반항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혁신가가 아니라 보수주의자, 심지어는 반동주의자로 만드는 꼴이 아닌가? 그렇지만, 기존의 모든 규칙과 기준을 거부했던 예술가들이 어떻게 대중들의 필요와 취향에 그대로 따를 수 있겠는가? 구성주의, 절대주의 그리고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던 위대한 소비에트 예술가들의 삶을 망쳐놓은 것이 바로 이런 문제였다. 

 

제7장 "우리가 할 일은 기뻐하는 것이다"

 

제8장 초현실주의

 

앙드레 브르통과 루이 아라공이 이끌던 초현실주의자들의 예술적 경향은 전체적으로 무의식의 탐구였다. 

 

전세계적으로 경제 사정이 악화되어 파시즘, 나치즘, 소비에트 공산주의 같은 비타협적인 정치 세력들이 힘을 얻게 되자, 예술가들에게는 네 가지 끔찍한 선택만이 주어졌다. 독재자에게 협력하는 것, 초현실주의의 세계로 잠수해 주위의 고통에서 눈을 떼는 것, 초현실과 적나라한 현실 사이에 다리를 놓는 것, 그리고 유럽을 떠나는 것. 이런 선택들은 초현실주의 운동을 뿔뿔이 흩어지게 만들었다. 

 

제9장 브로드웨이 부기우기

 

재즈는 좋았다. 왜냐하면 나쁜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무의식과 현대 예술의 형식적인 도전에 합치될 수 있는 길을 구해야 했던 것이다. 

 

내부와 외부의 균형점을 발견하는 바로 그 순간에, 이는 새로울 뿐만 아니라, 결코 정의내릴 수 없는 균형을 요구하는 폭력적인 표현 방식의 예술이었다. 

 

제10장 Cool Is Hot, Hot Is Cool

 

비트족은 두 가지 유산을 남겼다. 이들은 미국의 도덕과 가치를 무시함으로써 꼭 막힌 미국 사회에 위협을 가했다. 그 덕택에 미국이 감추고 있던 불가사의, 비밀스러운 열정, 예상치 못한 신성함을 인식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덕택에 이들은 자신과 다른 이들을 한없이 모독했다. 

 

제11장 우드스탁 네이션

 

아방가르드는 더 이상 변방에서 울리는 비판이 아니라, 한 세대가 내건 투쟁의 구호가 됐다. 아방가르드는 더 이상 신념 체계가 아리나, 출생증명서 위에 적힌 날짜가 되어버린 것이다.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대대로 부르주아 사회에 적대적인 입장을 취해왔다. 급진적인 에술은 중산층과 대중 예술이 지닌 어리석음과 물질주의(그리고 공허함)를 비판하는 아웃사이더 기질을 견지했다. 워홀은 텔레비전, 광고, 시장 조사가 찬양받고 있는 이 시대에 아방가르드가 대중문화에 적대적일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중문화 자체가 이미 아방가르드였던 셈이다. 

 

제12장 공원의 두 가지 산책로

 

제13장 미래는 없다

 

모든 이들이 진보했으나, 저항할 만한 중심은 존재하지 않았다. 아방가르드를 공격하는 것이 아방가르드가 선택할 수 있는 하나의 메뉴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제14장 오직 네트워크만

옮긴이 후기

 

부 록

 

1. 나의 세대

 

2. 인명 찾아보기

 

3. 작품 찾아보기

 

4. 더 읽을 만한 책들